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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May 17. 2021

4. 지독하게 우아한 공간

헌병은 서서 생각한다

공군은 훈련소에서 기본군사훈련단(이하 기훈단)을 수료한 뒤 각자 배정받은 특기에 따라 특기학교로 배속된다. 헌병 특기를 받은 나는 그중 행정학교라는 곳으로 가게 됐다. 행정학교는 많은 측면에서 이전에 있던 기훈단과는 다른 곳이었다. 일단 시설이 너무 좋았다. 기훈단은 6주 간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드는 공간, 즉 각자의 개성을 지우고 명령에 복종할 수 있게끔 이리저리 사람을 굴리는 곳이다. 다시 찾지 않을 곳에서 어차피 먹어야 할 음식은 맛이 없는 법. 밍밍한 음식을 내어오는 터미널의 식당처럼 반(半) 군인들이 잠깐 스쳐가는 이 공간은 애초에 많은 품을 들이지 않고도 운영되기 마련이다. 거기다 일정 수준의 '불편함'을 훈련의 수단으로 하는 곳이니 재건축을 그렇게 오래 미뤘던 것도 어찌 보면 합리적인 운영방식인 셈이다. 그와 달리, 이미 완벽하게 재건축된 행정학교는 난방시설부터 침대까지 웬만한 유스호스텔 정도는 되는 시설을 자랑했다. 이처럼 좋은 시설이 뜻하는 바 즉, 억압이 아닌 훈련과 통제의 새로운 방식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알려고 하지 않아도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었다. 개별 병사들을 더 이상 억압하지 않고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흉흉한 자신감의 표현인 셈이다. 당시의 나는 이렇게 적었다.

 

행정학교 입교 3일 차 저녁. 이곳 시설은 정말 완벽하다. 그러나, 현실로 다가온 자대 배치의 두려움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기훈단 성적보다 이곳 성적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듯한데, 이곳의 평가시스템은 상당히 운의 작용을 많이 받는다. 초반에 정하는 (추가) 근무자는 가위바위보로 선발되는데 그로 인한 추가 점수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2주 뒤 치르게 되는 각종 시험에서는 무조건 다 맞을 각오로 공부해야 함은 물론, 연극 준비나 포스터, 표어 준비도 열심히 해야 한다.


2주라는 짧은 기간은 되려 7명밖에 되지 않는 호실원들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미래가 없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이 고된 훈련이 거의 없어서 전우애를 느낄 계기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전우애는 이러한 정신적 스트레스 상황을 함께 견디는 데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까? 유일한 비교 대상인 기훈단과 비교하자면, 이곳은 동일한 특기생들이 배속지를 놓고 경쟁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관계적 측면에서 회의적이게 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관계를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 억압과 불편함을 대체하여 특기생들을 움직인 것은 바로 '배속지 경쟁'에서 오는 욕망과 불안함이었다. 기훈단에서의 특기 시험이 일종의 적성검사였다면, 행정학교에서의 시험은 전형적인 암기식 시험이었다. 전자는 자원이 한정된 훈련소 내부에서 따로 준비할 것이 없는 반면, 후자는 가르쳐주는 내용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모두 자신의 연고지와 가까운 부대로 가고 싶을 뿐만 아니라, 선택권이 주어진 이상 최전방은 기피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행정학교에서의 성적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기훈단에서의 억압이 '손해 볼 것 없는 일탈'의 즐거움을 주었다면, 행정학교에서의 경쟁은 그런 사각지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군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신체 권력의 미시적인 작용은 기훈단에서보다 행정학교에서 더 세련되어 보였다. 이제는 외부의 고된 훈련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내면의 자유로운 공간마저 완전히 박탈당하여, 굴욕적이지만 자발적으로 군대의 권위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이전의 권력 작동방식과 비교해서 한층 우아한 것이었으나, 더욱 지독한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행정학교란 우아하게 지독한, 지독하게 우아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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