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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hyu Aug 28. 2023

[지아PD] 남자친구 (1)

지아 PD의 두번째 이야기

커리어와 남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커리어를 고를 지아였다.


그래서 피디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도 지아는 거침없었다. 나의 이름을 걸고 만든 창작물을 세상에 내보인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었다. 자신이 기획한 프로그램이 완성될 때, 지아는 비로소 자신 또한 완성이 될 것 같았다.


그런 지아에게 남자친구의 자상함은 과분했다.


그는 지아의 진취적인 모습이 빛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빛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지아가 피디를 준비하는 동안 남자친구는 철저한 내조를 했다. 자소서의 맞춤법을 봐주고, 면접 전에 양복을 다려주고, 밥을 챙겨주었다. 지아는 혼자서도 잘 해냈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끔은 남자친구가 너무 오버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관심과 챙김이 나쁘지 않아 그리하게 내버려두었다.


피디가 된 후의 연애는 쉽지 않았다. 물리적 만남이 쉽지 않을 거란 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둔 터라 오히려 괜찮았다. 예상외의 타격을 주는 건 취업 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엄마는 “너 남자친구 같은 애 없다”라며 바쁜 만큼 지아가 남자친구한테 더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할머니는 왜 그리 험한 일을 하려고 하냐며 혀를 끌끌 차시다가 남자친구에게 시집갈 수 있게 몸 관리를 잘하라고 하셨다. (이제는 손절한) 친구 하나는 문자로 [축하해!! 근데 지아 남친은 이제 완전 헬 시작이네 ㅎㅎㅎ sns에 돌아다니는 짤 보니까 결혼정보회사에서 남자들이 선호하는 여성직업 중에서 어부가 꼴등이고 그다음이 피디였대 ㅎㅎㅎ]라고 보내기도 했다.


재밌는 건 지아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방송국 안 사람들도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는 거였다. 본부장님은 주로 “어~ 지아~ 아직 남자친구랑은 안 헤어졌고?” 라며 안부를 물은 뒤 “진정한 신입 피디라면 연애는 포기해야지~ 안 헤어질 거라고? 6개월 안에 헤어지는 거 걸고 나랑 내기할까?” 등의 농담을 이어나갔다. 메인 선배는 “연애할 시간이 있다고? 아직 살만한가 보네” 식의 말을 주로 했다.


평상시 지아라면 그냥 웃고 넘길만한, 딱히 악의가 담기지 않은 말들이었다. 하지만 숨도 쉴 수 없이 바쁜 나날들이 이어지고 남자친구와의 연락이 뜸해지는 요즘, 이런 말 하나하나가 가시가 되어 지아를 찔렀다. 돌이켜보면 지아는 늘 속으로 ‘아닌데요, 우리 사이는 내가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아도,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을 되뇌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남자친구는 지아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땅과 같았고, 그 땅이 물러지자 지아는 휘청였다. 지아는 이제야 남자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너무 늦진 않았을까. 넘쳐나는 카톡을 내려 남자친구의 카톡을 찾았다. 마지막 카톡이 이틀 전이었다. 우리가 언제 만났더라? 몇 주 전, 지아가 숏컷을 했을 때 함께 미용실에 간 데이트가 마지막이었다.


지아의 숏컷에 대한 남자친구의 반응도 지아의 마음에 쏙 들었었다. 거의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지아의 머리를 자르기 전, 미용사는 "남자친구는 괜찮은 거 확실하죠?" 라며 지아가 아닌 남자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왜 세상사람들은 지아를 앞에 두고 남자친구를 먼저 생각하는지, 씩씩거리며 한 마디를 하려고 하는데, 남자친구가 바로 대답했다. “제 머리가 아니라 지아 머리인데요. 지아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바꾸는 게 맞죠.”


지아는 벌써 귀를 간지럽히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남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지금 퇴근한다!! 이따 맥주 한 잔 어때?]

[나 지금 스터디 중이라 힘들 거 같은데…]

[10시쯤 끝나지? 나 지금 출발하면 그때쯤 도착할 거 같아! 내가 다 쏜다!]


지아는 가방 바닥에 굴러다니는 립밤을 찾았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빛나는 모습은 못 보여줘도 생기 정도는 있어 보이게 하고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곤이 몰려왔지만, 회사일만큼이나 남자친구를 아끼고 있다는 걸 이렇게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지아야, 나 다음 주 면접이잖아…]


아. 긴장된 상태로 자신의 면접 일정을 말해주던 남자친구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날도 유달리 피곤한 날이었다. 남자친구가 말해준 회사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아 그렇지. 미안 내가 깜박했다. 파이팅!!]


지아는 자신이 취준생활을 할 때 남자친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떠올렸다. 지아가 남자친구의 입장이었으면 당연히 서운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지아는 립스틱을 다시 가방에 던져놓고 피곤에 침침한 눈으로 남자친구 집으로 한우, 비타민, 과일 등등을 새벽 배송으로 갈 수 있게 잔뜩 시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아, 왜 그런 한숨이야, 남자친구가 섭섭하게 해 줘? 이거 안 되겠네 이거!”


웃음기 잔뜩 뭍은 말투로 큐비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팀장님이 말을 걸어왔다. 지아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집에 가면 10시 반. 아침 10시 반에 복귀하면 되니 그래도 밀린 잠을 10시간은 꼬박 잘 수 있을 터였다. 지아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묵직한 빨랫감이 담긴 가방을 들어매고 회사를 나왔다.


깜깜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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