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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Mar 26. 2024

새끼발가락

하찮지만 하찮지 않은


  쿵, 그리고 악! 1초도 채 되지 않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외마디 비명이 내 귓가를 찔렀다. 분주하게 외출을 준비하다가 그만 안방 문가 한쪽에 대충 세워 둔 아령을 발로 걷어차고 말았던 것이다. 고통에 눈물이 핑 돌고 발끝에서부터 욱신거리는 감각이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문지방이든 식탁 다리이든 자주 발을 찧고 다니는 나였기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웬걸. 오후가 되니 통증이 점차 심해지는 게 아닌가. 절뚝거리며 걷다가 ‘한두 번 발을 찧은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이다 싶어 신발을 벗어 보았다. 앙증맞은 새끼발가락은 자줏빛으로 물든 것도 모자라 불어 터진 면발처럼 퉁퉁 부어서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새끼발가락의 존재감에 병원을 찾아갔고 금이 갔다는 진단을 받았다. “최소 두 달, 뼈가 붙을 때까지 반깁스하고 있어야 해요. 많이 걸어도 안 돼요. 가능하면 걷지 마세요.” 44년 인생 처음 있는 일이라 심히 당혹스러웠지만, 당장 어쩔 도리가 없으니 반깁스를 차고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반깁스를 하면서 평화롭던 내 일상도 금이 가 버렸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반깁스한 오른쪽 다리가 저렸다. 벨크로를 너무 세게 잡아당겨 붙인 탓인가 싶어 살짝 느슨하게 풀어보았다. 한결 나았다. 숨통이 트이듯 혈관도 트인 모양이었다. 절뚝절뚝 부엌으로 걸어갔다.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고양이들 아침을 챙겨 주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책상 앞에 앉았다. 반깁스 때문에 움직임이 굼떠져서 평소보다 10분은 더 걸려서야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노트를 펴고 갑갑한 마음을 토해냈다. 숫자 18과 부주의했던 나를 탓하는 말들이 쉼 없이 쓰였다. 한참을 쓰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와중에도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그 욕은 제대로 못 쓰겠는지 숫자 18을 대신해 쓰는 꼴이라니. 그 정도로 아프진 않은 건가, 그만큼 짜증 나는 건 아닌가? 


  노트를 덮고 한 시간쯤 책을 읽은 뒤 거실로 나왔다. 이제 원래대로라면 운동할 시간인데, 운동을 할 수가 없으니 무얼 하나 싶었다. 몸이 찌뿌둥했다. 하지 말라니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를 어쩌지 못하고 나는 요가 매트를 폈다. 발에만 힘 안 주면 되는 것이니 누워서 하는 복근 운동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반깁스의 무게도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아 어떤 자세를 해도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해졌다. 힘이 실려야 할 곳에 실리지 못한 탓에 멀쩡한 부위에 근육통만 얻었다. 짜증이 치밀어 반깁스 속 가려진 새끼발가락을 노려보았다. 고작 새끼발가락 주제에, 진화론적으로는 퇴화한 기관인 주제에 왜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인지. 고작 새끼발가락 하나 때문에 친구와의 약속도 취소하고 잡혀 있던 미팅도 화상으로 돌렸다. 새로 장만한 코트도, 앞코 뾰족한 부츠도 두 달 후를 기약하며 옷장과 신발장 안에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이 전부 버거워졌다. 고작 새끼발가락 하나 때문에. 분리수거 하러 내려가 택배 상자 하나를 뜯어 버릴 때도 절뚝절뚝, 알아서 먼지를 빨아들여 주는 청소기를 밀 때조차도 절뚝절뚝, 그렇게 길어야 15분 남짓한 시간을 절뚝대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진이 쏙 빠졌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려고 모래 삽과 비닐봉지를 들고 고양이 화장실 앞에 쭈그리고 앉다가도 균형을 잡지 못해 차가운 욕실 바닥에 꽈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할 수만 있다면, 초강력 접착제라도 바르고 당장 이 반깁스를 풀어버리고 싶었다. 엉덩이 전체로 뭉근하게 퍼지는 통증에 눈물이 고이며 눈가가 시큰시큰했지만, 별수 없었다. 욕조를 붙잡고 왼발에 다시 힘을 실어 일어날 수밖에. 일상이 삐걱댄다고 삶의 시계를 잠시 멈춰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소한 일조차 힘겹게 해야 하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내 안의 좌절감은 점점 몸집을 키웠고 이때다 싶었는지 무기력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를 집어삼켰다. 눈을 감고 누웠는데 2년 전 이석증으로 고생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작은 이석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흘러나와 내 림프액을 휘둘러 놓으며 일상을 뒤흔들었더랬다. 몇 미크론도 안 되어 전자 현미경으로 봐야 할 정도의 작은 이석이 일으켰던 파장을 돌이켜 보니, 문득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아 보였다. 과거의 더 큰 불행으로 현재 체감하는 불행의 크기를 줄여놓은 것뿐이지만, 나름대로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 이대로 무기력에 질 순 없지!’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켜 삐걱거리는 일상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


  한 달이 지나고, 다시 병원에 갔다. 그래도 한 달이나 지났으니까 뼈가 제법 붙었다며 반깁스를 풀어도 된다고 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금이라는 것도 그리 쉽게 붙는 게 아니었나 보다. 의사는 2주 더 지켜보자고 했다. 내가 봐도 엑스레이상 새끼발가락에 간 금은 온전히 붙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반깁스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의 열망 어린 눈빛을 읽었는지 의사가 몇 마디 덧붙였다. 다행히 금이 더 벌어지지 않고 붙고 있긴 하지만 아직 반깁스를 푸는 건 위험하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풀어도 괜찮은데 가능하면 하고 있으라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무기력이 밀려왔으므로. 강낭콩 한 알만 한 새끼발가락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발을 지탱하고 체중을 분산시켜 반듯하게 설 수 있도록, 발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해 주는 새끼발가락. 사람 하나를 무기력의 늪에 빠뜨릴 힘을 가진 새끼발가락. 조용히,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내가 그동안 널 너무 하찮게 봤네.”


  그러고 보면 작은 것의 힘은 의외로 대단하다. 나를 한없는 무기력과 어둠의 나락에 빠지게도 하지만, 그 반대일 때도 마찬가지다.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어놓은 것도 실은 ‘고작’, ‘겨우’라 치부했던 것들이었다. 30분 모닝 페이지, 최소 한 시간 독서, 매일 최소 30분 운동, 채소류부터 먹는 식습관. 내 감정을, 내 지식을, 내 건강을 나아지게 도와준 건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별것 아닌, 바로 사소한 습관이었다. 좁쌀 한 톨로 정승댁 사위까지 된 전래동화 속 청년처럼 작은 습관들이 쌓이고 불어나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새끼발가락이 불러온 무기력을 이기기 위해 이번에도 그 힘을 잠시 빌리기로 했다. 아침마다 글을 쓰며 감정을 바라보고 어루만졌다. 도토리 모으듯 짝꿍과 행복을 모아가는 어느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내 일상의 행복을 떠올렸다. 이모 아프지 말라며, 앙증맞은 입술을 반깁스에 대고 “호” 불어주던 조카가 떠올라 내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그려졌다. 


  나이가 들수록 몸의 기능은 떨어져 갈 테니 작은 발가락 하나, 작은 이석 하나가 일상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더 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삶은 쉬이 놓아지지 않으니, 별수 있나. 그때마다 ‘고작’의 힘을 빌려 뒤흔들리는 시간을 살아낼밖에. 그리고 그 ‘고작’이 또 나를 일으키리라 믿는다.







이 글을 끄적거리고도 한 달이 더 지났다. 여전히 내 새끼발가락은 온전해지는 과정에 있다. 격하게 뛰는 종류만 아니면 운동해도 된다고 해서 필라테스도 가고 헬스장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라테스 하러 갔다가 잠시 보수 위에서 가볍게 오르락내리락 뛰는 동작을 했는데 할 땐 괜찮은 듯했지만 후에 집에 돌아와 욱신거려서 조심하기로 했다. 언제쯤 온전해질까, 나의 하찮아서 소중한 새끼발가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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