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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지원아.
너는 어린 시절부터 소설쓰기를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잘 안됐지.
원고지를 북북 찢어 휴지통에 던지는 게
드라마의 흔한 클리셰인 줄만 알았는데...
해보니 진짜였지?
너무 부끄러운 수준의 글을
누가 볼까 봐 찢어버릴 수 밖에 없었지.
맞다. 너의 선천적인 탤런트는
‘에세이’에 있다. 그건 맞아.
픽션보다는 논픽션이 잘 써 질거야.
그럼 도대체
소설은 언제 쓸 수 있는지,
언젠가 쓸 수 있기는 한 건지
묻고 싶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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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지원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2070년 현재,
사람들은 나를 소설가라고 부른다.
작가생활 초반에 냈던 에세이들보다
중년에 쓴 소설들이 더 인기를 얻었어.
지금 젊은 네가 소설을 쓰기 어려운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내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 사람, 스토리.
그 모든 것들이 아직 덜 익어서
그런 것 같구나.
소설가가 하는 일이
완전히 새로운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너 어렸을 때 한 예능에
배우 박신양 씨가 나와서
‘연기는 경험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 기억나니?
겪어보지 않은 상황과 대사를 연기하는 것,
그것조차도 그는 ‘경험한 것을 표현하는 것’
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더구나.
그 당시에는 조금 의아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이 맞아.
경험해보지 않은 것도
살아온 자기만의 내력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표현하는 것이더라고.
소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결국…
어느 정도 너의 경험치가 쌓이고
그것들이 인생의 유의미한 기억으로
무르익고 나면
그게 자연스레 소설이 될 재료가 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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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젊은 지원아,
네가 쓰게 될 소설의
등장인물들, 사건, 상황 등
모든 재료들이 지금 지구 곳곳에서
익어가고 있다.
물론,
네가 과거에 한 경험도 마찬가지야.
그 기억들도 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조합되고 해체되며
무르익어가고 있지.
재료가 다 익지 않았을 땐
소설이 되기 어려워.
하지만 재료가 다 익는다면
너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거란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라.
너는 소설가다.
2070년 9월 24일
할머니가 된 지원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