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경문 Feb 01. 2024

한 장의 휴지, 한 순간의 삶

나는 매일 아침  눈높이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에서 인생을 본다

한 장의 휴지, 한 순간의 삶 < 글 정경문 사진 픽사베이 >
"아빠, 나 휴지 좀 갔다 줘~"


나는 아들이 화장실에서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용도실로 갔다. “어, 이상하다? 벌써 휴지가 다 떨어졌네?” 엊그제 주문한 것 같았는데, 그렇게 많던 휴지가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쓸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소소하게 소비되며 조금씩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마지막 롤, 심지 끝 마지막  칸이라는 현실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마치 우리 인생의 시간처럼.


마지막 롤, 마지막 심지


그 순간,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한 장의 휴지가 인생의 한 순간과 얼마나 닮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얇은 한 장 한 장은 무게감을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한꺼번에 모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한 장, 한 장의 휴지도 막상 그것들이 모이면 나름의 크기와 무게가 되어버린다. 마치 내 하루가 눈에 띄지 않게 지나가듯, 하루는 무겁지 않지만, 그 하루가 모이고 엮여서 삶을 이루기에 그 크기와 무게가 느껴진다. 그렇게 어제의 하루와 연결된 오늘의 하루, 잘 뜯어보면 지금이라는 순간도 끊임없는 순간의 연결이었다. 두루마리 휴지가 한 장 한 장이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의 삶도 순간과 순간이 연결되어 있다. 한 칸 앞의 휴지를 쓰려면, 반드시 그전 칸의 휴지를 뜯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오늘을 건너뛰고 내일을 만날 수 없다. 어제 잘 풀렸다고, 이제 그 연결을 안다고 자부했고 자만했다. 그래서 더욱 힘차게 당겼다. 그리고 휴지는 선반에서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휴지는 왜 바닥에 떨어졌을까 <글 정경문 사진 픽사베이>


휴지는 왜 바닥에 떨어졌을까?


이렇게 연결된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에는 심지가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침대 밑으로 떨어진 두루마리 휴지를 줍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휴지 끝이 걸리는 일. 그 끝을 당기면 당길수록 제자리에서 맴도는 상황이 생긴다. 휴지를 풀 때는 중심을 잡고 한 칸의 끝을 당긴다.  휴지를 잘 풀기 위해서는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인 심지를 잡는 일이 우선이다. 심지에 중심을 두면 인생도 술술 풀린다. 하지만 그 주도권이 휴지 끝으로 가는 순간, 휴지도 인생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내린다.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진 휴지가 젖었다.

휴지는 바닥의 물을 머금었고, 나는 그것을 끊어내야 했다.

살다 보면 느닷없이 내가 아픈 날도 가족이 아픈 날도 생겼다. 갑자기 슬픈 나날들도 찾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그랬다. 승진에 떨어졌을 때도, 중요한 프로젝트가 실수로 엉망이 되었을 때도, 아내와 다툴 때도 그랬다. 삶의 중심을 잡고 있을 때는 이 모든 것들이 잘 컨트롤되었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에 지쳐 중심이 흔들렸을 때는 외부에 휘둘려 내 두루마리 휴지를 잃게 되었다. 이렇게 어제 젖은 휴지들은 계속해서 오늘의 나를 젖어들게 만든다. 과감하게 끊어내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지나간 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남은 휴지를 위해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끊어 내기로 한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가 더 빨라진다 < 글 정경문 사진 픽사베이 >


이제 남아 있는 휴지에 집중해 본다.


처음에는 많은 것 같지만 결국은 끝을 드러낸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휴지의 반지름이 클 때는 마치 어린 시절과 같다. 아무리 써도 줄어들 것 같지 않은 시간은 이제 후반부로 다가갈수록 그 고갈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남아있는 두루마리 휴지 반지름이 작아질수록, 그 속도도 비례해서 빨라진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야 한정된 자원이라는 한계를 인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끝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한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재산이 많아도 지식이 풍부해도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우리에게 주어진 두루마리는 딱 하나 씩이다. 사람은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두루마리’를 한 롤씩 선물로 받는다. 한 묶음의 휴지가 각자의 상황과 용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한정된 시간을 선물 받아 선택과 경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내가 받은 휴지로 내 삶을 어떻게 풀어갈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나는 휴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지금의 한 순간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가기 위해 그 순간을 채워가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두루마리 < 글 정경문 사진 픽사베이 >


매일 아침 나는 눈높이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에서 인생을 본다.


중심을 잡고 술술 휴지를 풀어내는 것처럼, 삶의 중심에 서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 시간을 쓰기로 다짐한다. 아들의 부름 덕분에 칸칸이 풀어낸 휴지와 함께 내가 하루를 그리고 인생의 순간들을 어떻게 풀어왔고, 앞으로 어떻게 풀어갈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 아들?!”

“아들아, 여기 있다.”

내가 너에게 선물한 시간. 이제는 네가 풀어야 할 너의 그것.

아들아 여기 있다. <글 정경문 그림 픽사베이 >


*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잡지 <월간 에세이> 2024년 2월호에 게재된 정경문 작가의 『삶의 향기』코너 수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 아이스 홍시만 귀한 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