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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문 Feb 09. 2021

그 많던 생수통은 누가 다 거꾸로 꽂았을까

'인정'에 대한 당신의 이유 있는 목마름

나는 커피를 즐긴다.


여름철이면 냉커피를 마시기 위해 냉동실을 연다.
얼음이 조금 있다. 얼음을 쓰고 물을 채워 넣는다.
얼음이 없다. 얼음판에 물을 채워 넣는다.

문득 생각이 든다.

늘 채우지는 않고 빼먹는 인간들
난 늘 채워 넣는 쪽의 사람이었다. (과거형)

겨울철이면 따뜻한 커피가 좋다.

짧아진 해 덕분인지, 낮은 기온 덕분인지 Heat up이 필요하다. 그럴 때 카페인이 담긴 따뜻한 커피만큼 보약은 없다.


아침이면 뜨거운 물을 얻기 위한 정수기 성지순례가 시작된다.

우리 사무실은 커다란 생수통을 거꾸로 꽂아 마시는 정수기를 썼다.  사무실에 사람이 많다 보니 물이 없을 때가 많았다.  무겁지만 생수통을 들어 남자답게 내리꽂았었다.(과거형)

문득 생각이 든다.


채우는 사람 따로,  빼먹는 사람 따로

사무실 정수기 물을 꽂는다고 칭찬해주는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다. 빼먹기만 하는 사람이 미워졌다.

생수통을 내리꽂기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얼음도 물도 채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달랬다.

정수기를 채우지 않음으로 인해.


여태껏, 사회에 비어있는 역할을 내가 채워 넣으려고 했다.

부서일도 마찬가지였다. 전화가 오면 담당자가 아니어도 "담당자 연결해드리겠습니다." 하는 법이 없었다.
"제가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의 자세로 10년 이상을 지냈다.

 

사회에 비어있는 역할은 너무도 많았고,

나는 그 빈칸을 채우다가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바닷가에서 쌓는 모래성처럼,

계속 쌓아도 쌓아도 파도는 내 노력을 비워냈다.

파도는 내 노력을 비워냈다


이런 상황들이 화가 났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나의 노력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그 일을 나에게 시킨 사람은 없었다.

내가 굳이 그 역할을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


화난 이유는 둘째 치고,

차라리 하지 않고 화도 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었다.
하고 나서 하지 않은 사람들을 미워할 바에야 나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난 한동안이나 정수기를 채우지 않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정수통은 늘 꽂혀 있었으며

얼음도 채워져 있는 날이 많았다.


'그 많던 정수기는 누가 다 거꾸로 꽂았을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
내가 착각하고 있었다.


그 일은 인정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 일도 인정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일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을 위해 일하면 종이 되고, 나를 위해 일하면 주인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만든 금강경(금강 반야 바라밀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주 상보 시(無住相布施)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

난 생수통을 보며 혼자 베풀었다며 상(생각) 짓기에 빠져있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물이 나오지 않는 정수기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한동안의 내가 비겁하게 생각됐다.

더 이상 비겁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짐한다.

이제 빈 정수기를 만난다면.. 다시 만난다면


"그냥 확 생수통을 거꾸로 꽂아 버리리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의 정수기가
얼음이 나오는 직수 정수기로 바뀌었다.



과학 나이스, 과학 마술, 과학 최고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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