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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 Oct 23. 2021

불안장애백신은 없나요?

엉킨 실타래를 그냥 안고







 그놈의 불안장애와 반드시 이별하려고 부던히 공부하고 버둥거렸다. 이제 어떤놈인지 실체도 알았고 언제, 어떤 자극이 주어질때 심해지는지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공황발작이나 불안발작 등의 증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DSM-4에서도 질병이나 증상의 경중을 판단하는데 있어 일상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문항은 대부분 포함된다. 증상은 평균 5년간 4-5회로 한정되었고 마지막으로 발현한 날로부터 심지어 2년 이상 지났다. 사실 불안장애가 있다고 당당히 말하기도 어려운 경계선적-불안장애 환자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여전히 정신과는 못 갔다. 정신과를 가기에 아직 나는 일상생활에 큰 방해를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나의 불안 여부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눈에 띄게 불편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많은 일들은 내 머리 속에서 생각과 상상이라는 형태로 일어난다. 끔찍한 상상은 여전히 제어하기 힘들지만 잘 피해가는 방법은 해가 갈수록 세련되진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나는 그것을 타인에게 교묘하게 잘 숨기는데에도 익숙해졌다.

 운전할때 긴장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아기에게도 나에게도 성공했던 둔감화의 요법을 사용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해서  새로운 길을 긴장 상태에서 아기를 뒤에 태우고 다녔다. 무조건 양보하고 모든 차를 보내고 그제서야 내가 갔다. 수없이 많은 상상을 했다. 뒤에서 차가 박으면 바로 아기한테 충격이 간다. 비상등을 틈만 나면 울리고 가끔씩은 창문을 내리고 한번만 끼워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래도 다들 그렇게 비굴하게 하니 알아서 비켜서 갔다.

또한 그간 아기에게 좋은 곳에 많이  데려가서 많은 것을 체험하게 하지 못했던 부채감도 덜어놓고 아기에게 스스로 생색 아닌 생색도 내고 싶은 의도도 조금 있었다. 기관을 보내지 않고 조력자도 없이 24시간동안 아기와 떨어지지 않았다. 어린이집을 탐방한다고  달동안 온전히 가정보육을 자처했다. 충분히 못했던 태교를 지금이나마 하고 싶었다. 이제까지 힘들게 지켜왔던 아기에게 소리지르지 않기로 한 룰이 처음으로 깨졌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어린이집을 드디어 보냈다.

 기관을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대상포진이 왔다. 아마도 온 몸의 긴장이 그 때 풀렸던 모양이다. 아기를 데리고 있는 동안 당연히 운동도 못하고 양질의 좋은 음식도 먹지 못했다. 아파도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한것은 물론이었다. 대상포진은 생각보다 강력한 놈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후유증 없이 깨끗히 낫는 다른 질병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놈은 이마에 영광의 상처를 남겼다.

 대상포진과 함께 임파선염도 같이 왔다. 대학병원에 가서 조직검사와 CT사진까지 찍었다. 다행히 결과는 큰 이상이 없었지만 결과가 나오는 동안에는 무서웠다. 혹시라도 암이 아닐까, 불치병은 아닐까 걱정됐다. 안그래도 건강염려증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크고 작은 건강이슈는 치명타였다.   면역력 문제였다.  노력이 오히려 건강을 갉아먹는 꼴이 되버렸던 것이다.

 알고 지내는 남자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 동생도 대상포진 유경험자였다.





"도대체 집에서 뭘 하길래 대상포진까지 와?"

"글쎄. 내가 집에서 도대체 뭘 했을까."





 나는 육아만 했다. 하지만 육아라는  글자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업무가 숨어있다. 수많은 돌발상황은 물론이거니와 그때마다 유려한 문제해결능력이 필요했다. 극복 전략 방법이 잘못됐었을까? 아기에게도 통했던  방법이 도리어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하긴 30개월동안 박혀있던 말랑말랑한 연한 유전자와 3n 동안 뿌리깊게 박혀서 반복재생된 늘어진 테이프같은 괴상한 유전자가 과연 같을 거냔 말이다.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리고 또 관련 서적들을 뒤져봤다. 불안장애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었다. 당뇨나 혈압처럼 조절하는 것이 다였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보단 증상발현에 대한 대증치료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담치료도 좋은 방법중에 하나였다. 상담도 꽤 적극적으로 받고 있었다. 나는 할만큼 그래도 열심히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장애를 고치려고 부던히 노력했던 내 시도가 절대 헛수고는 아니었다. 이 녀석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빛나는 성과도 있었다. 아기는 이제 비행기소리나 알지 못하는 갑작스러운 큰 소음에 대해서도 무지막지하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귀중한 결과를 얻었다. 그거면 되었다.

 내가 읽었던 책 중에 거북이와 토끼가 경쟁하는 것 부터가 둘 다 이상하다는 구절이 있었다. 거북이는 거북이들 노는 곳에서 애초에 있어야 한다. 거북이는 원래 육지에서 달리는 동물이 아니다. 토끼 역시 거북이한테 달리기 경주를 제안하는 것 부터가 정당한 놈이 아니었다. 정상이라면 둘이 만나지 못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완전하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내가 억지로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불안이라는 감정을 한 순간에 떨쳐버리는 것 자체가 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환상에 의해 너무 몰아부친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을 과도하게 숨기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무리한 시도를 함으로써 더욱   신체적인 무리가 왔다. 아이를 셋이나 낳고도 몸도 마음도 멀쩡한 육아 선배를 보고 스스로를 경멸했다.  사람은 저렇게까지 하면서도 정말  지내고 본인 일도 열심히 하는데  나는 고작 아이   키우면서 그렇게 죽는 소리를 하느냐고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나를 가장 미워하고 불안하게 했던   자신이었다.




 코비드 백신처럼 주사라도 맞아서 항체가 생기는 방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불안과 함께 지내지만 서서히 멀어지는 방법을 찾아봐야 할 시점이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며 많은 것이 쉬워졌다. 더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는 나를 예전보다 절반만 미워할 수 있었다. 겁이나고 긴장되도 불안장애탓이라도 함으로써 마음속으로 자해를 골백번도 더 했던 내 생각을 멈출 수 있는 두터운 근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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