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애착이 고장 났다는 걸 알았다.

뇌에서 나 모르게 벌어지는 시스템

by 쌈마이작가

어머니는 요양원에 가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요양원에 있는 친구의 하소연을 듣고 온 날이면, 당신은 한 방에 갈 거라고 하셨다. 그래야 자식들 고생 안 시킨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당신의 말처럼 갑자기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연락을 받고 갔을 땐 어머니는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기계와 연결된 호스로 숨 쉬고 있었다. 기계가 억지로 공기를 밀어 넣고, 다시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내렸다가 했다. 그 소리에 맞춰 심장 박동을 나타내는 그래프도 같이 움직였다. 어머니의 숨소리는 기계적이었다. 간호사가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의사가 한쪽 소매를 걷었다. 물어보지도 않은 시간을 알려줬다. 사망 선고를 내렸다. 기계의 전원이 꺼졌다. 입과 연결된 호스가 뽑혔다. 어머니는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간호사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드라마 속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형과 누나들, 그리고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서둘러 장례식장을 잡았고, 부고 문자를 발송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슬픈 감정은 들지 않았다. '누구나 한 번은 겪는 일이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겪는 것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렇게 슬픔을 참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장례를 치르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대구에서 새로 시작하려던 생활을 접고 본가로 왔다. 덤덤하게 유품 정리를 했다. 곳곳에 어머니의 흔적이 있었다. 여기서 벗어나자, 그리고 극복하자. 서둘러 이사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생활을 이어갔다. 노트북과 액션캠, 무선 마이크, 드론을 샀다. 스페인, 동유럽, 서유럽, 북유럽, 런던,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몽골 대초원까지 혼자 떠돌아다녔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슬픔을 아주 세련되고 완벽하게 극복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우연히 도서관에서 애착 이론 책을 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슬픔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친 것뿐이었다.


내 여행은 극복이 아니라 도피였다. 거대한 슬픔을 맨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내 무의식은 나를 살리려고 애착 시스템의 전원을 강제로 꺼버린 것이다. 애착 이론에서는 내 행동을 '비활성화 전략(Deactivating Strategies)'이라고 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 일단 외웠다.


그 비활성화 전략의 실체가 바로 여행이었고, 유튜버의 시작이었으며, 맹목적인 도전이었다. 내 무의식이 내린 생존 명령이었기에 어떤 설렘도 감흥도 없었던 것이다.

애착 이론은 이것을 '애착이 고장 난 것', 즉 '생존 시스템이 고장 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 접한 책은 《그들이 그렇게 연애하는 까닭》이었다. 책에서는 애착이 단순히 누굴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라고 했다. 내 의지로 제어나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식욕, 수면욕, 성욕은 이성으로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다 구조하러 온 사람의 머리를 짓누르기도 한다. 귀신을 본다면 비명을 지르고, 남의 등 뒤에 숨고 매달린다. 머리로 생각해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생존 본능인 것이다.


이처럼 생존 본능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제어나 통제하지 못한다. 말과 행동은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이다. 즉, 생존본능 앞에서는 스스로 감정을 제어나 통제를 하지 못한 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애착도 똑같다. 스스로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생존 본능이다. 이것도 그냥 외웠다.


그래서 나는 거대한 상실의 고통 앞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실뿐만 아니라 연인과의 이별 또한 눈물 찔끔 흘리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뇌의 무의식은 이별을 "이대로 가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존 공포로 인식한다.


그래서 이별은 곧 생존의 위협이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릴 때처럼, 이별 앞에서도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제어나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연인과의 이별 앞에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한다. 누군가는 욕을 하고, 누군가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거나 협박하고 집착한다. 반대로 나처럼 감당 못 할 거대한 상실 앞에서는 애착 전원을 꺼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이성적 결정이 아니다. 무의식이 나를 살리기 위해 뇌에서 나 모르게 벌이는 짓이다. 생존 위협에서 내린 명령이다. 그래서 본인조차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못하고, 타인의 행동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서 나온 말과 행동들이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


그래서 애착 시스템은 그 유명한 며느리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수학 공식처럼 외우기로 했다. 대입해 보면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상실의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며, 시간이 해결해 주거나 돈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틀렸다. 책을 읽어가며 알았다. 고장 난 애착 시스템에 따라서 나는 좀비처럼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나의 감정, 시간, 돈을 허비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무의식의 명령에 따라 삶의 에너지를 미친 듯이 소모하고 있었다.


내 깨달음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유레카를 외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감흥 없는 여행에 돈을 뿌리고, 소주를 마시며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아니라는 것, 그 에너지를 이제는 나 자신과 나의 일상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텍스트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도.


물론 나는 심리학 전문가가 아니다. 책 몇 권 읽고 잘난 척하는 것도 아니다. 주관적인 해석이나 과대, 확대 해석이 섞여 있을 수 있으니 비난의 댓글을 달아도 좋다. 아홉 살 애착을 가진 꼬마의 일기장일 뿐이니까.


"전문가가 아니다", "주관적이다", "과대, 확대 해석할 수 있다", "비난해도 된다"라고 미리 밑밥을 까는 것. 애착 이론에서는 이걸 '방어기제'라고 한다. 방어기제. 이것도 외우자.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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