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애착이 진정한 슬픔을 마주하는 법
애착 이론을 접하고, 무너진 일상을 찬찬히 뜯어서 맞춰 나간다. 규칙적인 취침과 식사를 한다. 아니, 하려고 노력한다.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가기도 한다. 비대해진 몸뚱이는 뜯어지지 않는다. 이대로면 뚱뚱한 좀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스를 다시 등록했다. 예전처럼 맹목적인 마음에서 몸을 혹사하는 게 아니었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이제는 확실한 명분이 존재했다. 줄어드는 몸무게만큼 하찮은 만족감도 분명 따라올 것이다.
잠들기 전 유튜브를 뒤적거리다가 영화 <데몰리션(Demolition)> 리뷰를 봤다. 주인공의 기행이, 지난 2년간의 내 모습과 무섭도록 닮았었다. 바로 정주행했다.
영화의 첫 장면. 아내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병원에서 눈을 뜬 그는 멀쩡하지만 아내는 죽었다. 병원 복도의 조명이 깜빡깜빡한다. 1인칭으로 의식이 깜빡이는 연출일 수도 있지만, 이건 애착 시스템 전원이 꺼진 거라고 볼 수 있다.
데이비스 무의식은 아내를 잃은 거대한 상실과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무의식은 데이비스를 살리기 위해 애착 시스템 스위치를 강제로 내려버렸다. 데이비스는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가 된다. 데이비스는 슬픈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아내의 장례식에서 거울을 보며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지으려고 애쓴다.
이런 데이비스는 병원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식욕이 당길 뿐이다. 무덤덤하게 복도로 나와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는다. 초콜릿이 걸려서 나오지 않는다. 데이비스는 고객센터의 주소를 휴대폰으로 찍는다. 지금은 그깟 초콜릿이 중요하다.
데이비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죽음을 회피하게 된 것이다. 내가 경험한 완벽한 비활성화 상태가 되었다.
데이비스에게 장인과 회사 동료들, 심지어 자신의 부모가 "힘내라", "좀 더 쉬어라"라며 위로한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좀비다. 그래서 이런 위로가 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대한 통제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일수록 거부하고 거리를 둔다. 회피형의 방어기제다.
장례식을 끝낸 데이비스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통근 기차에서 대화중에 비상 브레이크를 확 당겨버린다. 헤드셋을 끼고 길거리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다닌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미친 짓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런 걸 흔히 우리는 '관종'이라고 부른다.
애착 이론상 상실의 고통에서 오는 이런 뜬금없는 기행은, 제발 누가 나 좀 살려달라는 비명이자 절규다. 내가 지금 이상하다고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고 발악하는, 불안형의 항의 행동이다.
데이비스는 겉으로는 감정을 끄고 철저히 '회피형'처럼 굴면서도, 무의식 밑바닥에서는 누군가 자신을 통제하고 붙잡아주길 바라는 '불안형'의 행동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데이비스는 극단적인 회피와 불안이 동시에 오작동하는 상황이다. 애착 시스템이 고장 난 것이다.
나는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았지만, 갑자기 유튜버가 되겠다고 설쳤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다. 평소에 생각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말도 더듬는다. 그럴 끼도 없는 놈이 카메라를 들고 설레발을 친다고 하니 남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카톡으로 내 소식을 받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무의식은 "내가 지금 이상해", "제발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줘!"라며 관심받기 위한 행동이었던 거 같다.
이런 데이비스가 손을 내민 대상은 다름 아닌 자판기 고객센터 직원 캐런이다. 자판기 고장에 대한 항의 편지에, 자신이 아내를 만난 순간부터 장인에 대한 이야기와 텅 빈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있어 안전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을 밀어내면서도 누군가와는 연결되고 싶어 하는, 공포 회피형의 모순된 발악이다.
그런 데이비스에게 회사 대표이자 장인인 필이 한 말로 인해 본격적인 기행이 시작된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해서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데이비스는 좀비처럼 문자 그대로 실행한다. 물이 새는 냉장고를 분해한다. 회사 화장실 문짝, 깜빡거리는 전등, 자신의 업무용 컴퓨터, 커피 머신까지 나사 하나하나 전부 분해한다.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이건 데이비스 자신의 자아와 무의식을 닥치는 대로 분해하는 짓이다. 자신도 어디가 고장 난 줄 모르니까 무작정 전부 분해하는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지 못한다.
이런 데이비스는 사람들이 끌고 다니는 캐리어를 병적으로 관찰하며, 그 안에 든 것들을 바닥에 쏟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닥치는 대로 분해해 봐도 고장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자신의 내면을 아예 쏟아내 버리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쏟아 내지 못한다.
분해해도 알지 못하고, 쏟아 내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파괴뿐이다.
데이비스는 중장비를 사들여 아내와 살던 고급 저택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데이비스는 아내와의 소중한 기억이 괴로워 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스는 그 집이 외부의 시선으로 지어진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집을 파괴하는 것은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과 자신의 가짜 자아를 철거하는 무의식적인 해체 작업이다.
바닥까지 다 때려 부수고 나서야, 부서진 아내의 화장대 잔해 속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던 초음파 사진을 마주한다.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부서진 집의 폐허(결혼 생활의 껍데기) 속에서 자신이 아내의 사소한 습관을 모두 기억할 만큼 그녀를 깊이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아내의 묘지를 찾아간 그는 처음으로 무너져 내리며 오열한다.
데이비스는 아내가 좋아했던 부둣가에 고장 난 회전목마를 수리해 두기 위해서 장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회전목마를 타고 즐거워하는 동네 아이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의 환영이 보인다. 데이비스가 웃는다. 이제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감정을 되찾은 것이다.
장인 '필'은 아내의 아버지이자,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대표이다. 철저하게 장인의 시선으로 직장과 결혼 생활이 이뤄져 왔고, 데이비스를 가장 숨 막히게 했던 현실의 상징과도 같다. 가장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대상에게 먼저 다가가 도움 청한 것이다.
기차를 멈추고,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총을 맞고, 자신의 고급 저택을 파괴하는 행동이 무의식의 명령이었다면, 장인의 도움으로 회전목마를 고치려 하는 것은 애착 시스템의 전원 코드를 다시 꽂으려는 의식적인 행동이다. 이건 아내의 외도를 용서하고,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파괴', '철거'를 뜻하는 영화 <데몰리션>은 지난 2년의 나를 보는 거 같았다. 파괴된 애착 시스템을 강제로 철거하고 다시 리모델링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냉장고를 분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내 돈으로 산 게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철거했다는 건 더욱더 아니다. 내 명의가 아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해서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라는 대사는 거대한 슬픔이 닥쳤을 때 어설픈 위로로 자신을 덮어두지 말고, 밑바닥까지 파고들어야 자신이 진정으로 잃어버린 게 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중요한 것이 뭔지 알아야 거대한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내 애착을 스스로 이해하려면 철저히 분해해야 한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방법이 일기다. 텍스트로 나를 분해해 보면, 내 밑바닥에 숨겨진 중요한 것이 뭔지 비로소 알게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