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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작가 Mar 28. 2023

제 눈빛은... 더럽습니다

단호한 거절도 필요하다


아니오, 제 눈빛은...더럽습니다. 



화창한 오후, 무표정한 얼굴로 지하철 역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멀리서 입꼬리를 양끝으로 한껏 추켜올린 한 여자가 상냥한 말투로 내게 말을 붙였다.


"어머! 지금 어디 가는 길이세요?"


분명 낯선 얼굴인데 아는 사람인 건가 싶어 괜한 불안감이 날 뒤덮었다.

'누구지? 어디서 만났더라?'

태연한 척하려 애썼으나 내 머리는 아주 미세한 기억의 파편까지 과거로부터 길어 올리는 중이었고, 기억을 짜내느냐 눈알을 굴리기 바빴다.


"네에."


최대한 짧게 답했다.

대답을 하는 순간에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찾기 위해 나는 여러 시간와 장소를 헤집어댔다.


"바쁘신가 봐요. 그런데 눈빛이 참 좋으세요."


'어라...? 눈빛이 좋다고?'

그녀의 한 마디에서 경험상 심상치 않은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갑자기 안도와 성가심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녀는 도믿걸이었다.  (도믿걸은 '도를 믿으십니까를 외치며 포교에 열을 올리는 사이비종교인'을 의미한다)

나는 쪼그라들었던 어깨를 활짝 폈다.


"아닙니다. 별로 안 좋습니다."


그때부터 앞만 보고 최대한 쌀쌀맞게 답하며 잰걸음으로 걸었다.

가끔 길을 가다가 한 분 또는 두 분으로 짝을 이루어 '인상이 좋거나 눈빛이 선하다'라며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멋모르던 시절,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가 한 명씩 양 쪽에서 내 팔짱을 꼭 끼고 걸으며 날 어디론가 끌고 가려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그 후로 도믿걸을 만나면 시베리아 바람이 휑하고 부는 것처럼 차갑게 대했다.


그런데 이번 도믿걸은 유독 끈질겼다.

그녀의 걸음이 내 보폭에 맞춰 빨라지는 것이었다.

"아닌데요, 인상 너무 좋으세요. 하하하!"

넉살도 평균 이상이다.

그녀의 눈, 코, 귀, 입, 이마에 모두 '친절, 친절, 친절, 친절, 친절!'이 새겨진 것만 같았다. 



'보통 사람이 아니야...
친절로 단단히 무장한 이 사람을 어쩐다?'



계속 이러다가는 목적지까지 따라 올 모양새였다.

집념으로 가득 찬 그녀.

배추를 셀 때만 '포기'라는 어휘를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 나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휙 하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눈에서 정확히 15도 아래를 향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최대한 초점 없는 눈빛으로 그녀의 눈에서 15도 아래만 바라보며 말했다.



"제 눈빛은... 더럽습니다. 그러니 따라오지 마세요."



영화 속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며 금자처럼 감정을 탈탈 털어내어 말했다.

그녀는 흠칫 놀란 눈치였다.

"아니, 인상 좋으신데...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데..."

계속 말을 이어가려 하는 그녀를 찌릿하고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드디어 도믿걸이 멈췄다.

난 그녀를 거기에 세워두고 유유히 지나왔다.

내 나이 20대 후반의 일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세게 말해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도믿걸'이 아니라도 이런 사람은 어디에든 존재한다.

좋게 말해도 상대에게 내 뜻이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다.

살면서 자기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뜻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상냥한 거절'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아무리 상대를 배려하고 돌려 말해도 결국 상대방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상처받았다며 서운해하기 마련이다.

필요하다면, 살면서 단호한 거절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때 그 도믿걸을 시작으로 나는 중요한 순간에 결연하게 내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조금은 귀찮았던 '의지가 남달랐던 도믿걸'은 내게 단호한 거절을 내뱉는 첫 연습상대가 되어준 기묘한 인연이다.

이미 내 기억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흐릿하지만 어딘가에서 또 '도를 믿으시냐'라며 포교를 하고 있을 그녀에게 감사를 전한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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