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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Feb 18. 2024

조용히 본업을 하는 일요일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답게.

눈을 뜬 순간부터 회색빛이 내려앉아 차분히 맞이한 일요일. 별다른 약속도, 주요한 계획도 없이 시작되는 하루는 언제나 약간의 들뜸과 약간의 권태를 준다. 어디를 나가볼까, 방을 한번 더 뒤집어볼까 거창한 일정을 잡았다가도 공기 중에 전해지는 눅눅한 습기가 들썩거리던 마음에 무게를 더하면 비로소 하고 싶은 게 뭔지 갈피가 잡힌다. 오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고 조용히 보내야지.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존재는 한 공간에 사는 가족들과 맥북, 애플뮤직뿐이다. 이런 하루는 수백, 수만 번 반복되었을 테고 그 시간들이 모여 나란 사람이 되었다. 결국, 오늘 하루도 나다운 하루일 뿐.


밥을 먹고 따뜻하게 끓여두었던 곡물차를 한잔 따라 초콜릿과 방으로 가져왔다. 애플뮤직에서 적당한 템포로 너무 처지지는 않되 사람의 음성이 없는 차분한 연주곡으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를 고르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는다. 맥북을 켜서 생각이 걷는 대로, 마음이 휘젓는 대로 글을 쓴다. 밖에서 포탄을 쏘고 연예계 핫이슈에 사람들이 핏대를 올리고 핫플에서 먹고 마시는 동안 나의 세계는 이렇게 다져진다. 지루해지면 핀터레스트에서 눈에 띄는 글귀를 일기나 필사노트에 옮겨적고 그 아래 조그맣게 의견을 덧붙인다. 오늘 발견한 문구는 바로 이것이다.


"인생은 모두 부업일 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본업이다.

부업에 목숨 걸지 말고 본래의 할 일로 돌아오라.

재가 되기 전에."


'재가 되기 전에'라는 표현은 아마 '죽기 전에'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지. 이 문장은 어느 유명한 책에 적혀있는 구절도 아닌 것 같고, 어떤 분이 거리에서 들고 있던 피켓의 문구였다. 흔히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계신 분들은 '하느님 믿고 천국 가세요' 같은 전도사 분들인데 저분은 어쩌다가 저런 문구를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일까. 그분에 대한 정보는 아주 작고 얕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문구는 가슴에 콱 박혀 계속 입으로 되뇌게 만들었다. 


비슷한 컬러라도 붙여두면 채도와 명도가 확연히 차이나 보이듯 다른 사람을 마주할 때 더 선명히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대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에서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지?로,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지? 에서 나는 이게 되게 중요한 사람이구나!로. 그렇게 나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게 된다. 최근 살면서 자발적으로 친해지지 않았을 법한 몇몇을 우연히 만나게 되며 이런 과정을 수없이 겪고 있다. 나는 생각보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결론은 때론 버겁고 때론 기쁘고 때론 쓰다. 어제는 세상에 비해 나는 너무 물러터진 맹탕 순두부구나 하는 걸 깨닫고 알코올 없이도 코가 매울 만큼 세상을 사는 알싸함을 느껴버렸다.


고요히 앉아 나다운 시간을 꾸려가는 것도 역시 본래의 할 일을 돕는 일이다. 다이어리에 다음 주에 할 일들을 적고 다음 주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본다. 그중에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일은 몇 개나 있을지도. 내가 만든 세계에서 왕좌는 내 것인 것 같아도 그게 아님을 아는 신중함을 배웠기에 조심스레 접근해 본다. 비 온 다음 날 등산을 하는 것, 점점 비어 가는 잔고를 채워줄 회사를 찾는 것도 할 수 있을 테다. 유난히 맛있는 점심을 차려먹을 수도 있고 얼굴을 잊어가는 친구를 갑자기 찾아가는 일도 해볼 수 있겠지. 오늘 같은 내일이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본래의 할 일을 하루 더 하게 되는 것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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