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호숫가에서 던지는 주체성에 관한 질문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명작 중의 명작이지만 어쩐지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책 표지를 장식한 울창한 숲과 한가운데 뿅! 하고 떨어진듯한 오두막은 '자연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내 신조와도 부합했고 로망을 부채질하기도 했으나... 책이 너무 두껍고(500페이지 내외 정도) 무엇보다 자연을 묘사한 소로의 문체가 나와 맞지 않았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나 손끝으로 점자를 느끼듯 글을 더듬어가며 머릿속에 장면을 그리는 게 아닌, 화면에 표현과 결과를 못 박아버리는 게 익숙한 세상에 풍성하게 이어지는 소로의 묘사가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 책을 읽으리라! 는 다짐을 해왔고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기에 내가 참여한 독서모임의 책을 월든으로 해버렸다. 이런 강제성으로라도 마음속에 굴러다니는 성가심을 털어버리자는 마음이었다. 하필이면 한창 도파민 중독으로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 릴스를 경주마처럼 공격적으로 오고 갈 때 월든을 읽어야 했기에 책을 읽는 건 더더욱 힘들었다. 모든 게 3초 안에 결판나는 영상 속 세상에서 월든의 종이 페이지로 시선을 옮기는 것 자체도 힘들었고, 한 페이지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도 어려웠으니 말해 뭐 해. 그렇게 지난했지만 결국엔 다 읽었다! 완독이다!
월든에 대한 정보가 없으신 분들을 위해 소개하자면 월든은 소로가 2년 2개월 2일(홍진호..?) 동안 월든 호수에서 혼자 기거하며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소로는 이 책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엣헴, 세상은 말이다'라며 인생 선배로서 점잔 빼는 투가 느껴지긴 한다. 그러나 소로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현시대에도 적용 가능한, 오히려 소로가 월든을 집필할 당시보다 더 적절한 가르침이 분명히 있다. 사치를 하면서는 철학이 자랄 수 없다든가 인간은 시선을 내부로 돌려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게 맞다든가.
개인적으로 이런 모든 가르침은 '삶의 주체성'이라는 키워드로 응집된다고 생각했다. 주체적이라는 건 어떤 사안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주체성이란,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고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탐색하고 설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소로 역시 자발적으로 교류가 적은 월든 호수에 오두막을 짓고 자유의지로 본인의 시간과 생활을 꾸렸던 걸 보면 주체적인 삶을 산 인간의 표본이라 볼 수 있겠다. 최근 모두가 자신의 색깔을, 남들과 다른 나를 보여주는데 치중하는 경향이 강한데, 정말 그런가? 하고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결국 세상의 취향 중 일부를 이야기하는 것뿐이고, 진정한 나다움보다는 사회 속에 용인될만한, 남들이 좋아할 만한 일부의 나를 취사선택해 그것이 온전한 나인 마냥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런 시대에 소로의 주체성은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만일 소로처럼 혼자 오두막을 짓고 살라면 살 수 있나?라고 자문해 보면 요원해 보인다. 일단 숲 속에 혼자 사는 게 너무 무섭고요.. 벌레가 싫습니다.. 그럼 소로처럼 물리적 환경을 조성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나의 주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를 고민해 본다. 일단 SNS 끊기. 소로였다면 지금 범람하는 온갖 SNS에 진절머리를 내고 일갈했겠지. 또.. 오랜 고전들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보기.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표현으로 표현하지 않기. 일상 속에서 자연의 신비를 양껏 느끼기. 적다 보니 요즘 도파민 디톡스로 일컬어지는 방법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소로는 어쩌면 이런 시대가 오리라 직감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