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사람의 인터뷰 도전기.
매일 오전 습관처럼 확인하는 메일함에서 어느 날 눈에 띄는 문구를 발견했다. 누군가 브런치를 통해 협업을 제안했다는 말. 가파르게 심장이 뛰면서 기대감은 이미 천공을 뚫었다. 누구야, 드디어 책을 쓰게 되는 건가, 아님 강연? 근데 내가 강연을 할 수 있는 뭔가가 있나? 어떤 거라도 상관없으니 이상한 장난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메일 제목을 클릭했는데 그 안에 쓰여있던 내용. '인터뷰를 하고 싶다'. 저를요? 제가요?
여러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파악한 상황은 이랬다. 대학생들이 전공 수업 과제로 공모전에 제출할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하는데, 주제를 캥거루족으로 선정했고 인터넷에서 서치를 하다가 내 글을 발견했다고. (아직도 안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https://brunch.co.kr/brunchbook/babykangaroo 이쪽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니 이런 식으로도 '도를 믿으십니까'가 상당수 접근한다길래 인터뷰 내용도 파악할 겸 인터뷰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뭐랄까.. 내용이 굉장히 패기 있었다. 의도했던 바를 침해할까 조심스레 건넨 의견도 시원시원하게 수렴이 됐다. 이 정도 성의로 '도를 믿으십니까'를 하면 넘어가줄 의향이 생길 정도로(비유적 의미다. 진짜였으면 바로 신고했을 거다.) 적극적인 모습에 '경험 안 해본 건 다 해 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을 결정한 이후엔 인터뷰 답안지도 정성 들여 준비하고, 혹여 개인적인 케이스로만 접근하면 캥거루족의 극일부만을 이야기하게 될까 두려워 캥거루족으로 사는 지인들에게 간이 인터뷰지를 돌려 의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두려웠다. 인터뷰이로서 준비한 성의만큼 결과물이 잘 나와서 공모전에서도 수상을 하길, 이왕 인터뷰를 했으니 공영방송에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얼굴을 드러내는 게 싫고 힘들었다. 어떤 의도든 말이나 글로 표현된 이상 사람들은 본인의 가치관과 생각에 의해 해석하고 뜻을 부여하기에 욕먹는 건 뻔해 보였다. 더군다나 과학적인 사실도 아니고 대체로 사회에서 부정당하는 존재가 개인적 일화에 근거해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게, 그것도 지금처럼 닉네임에 숨어 얘기하는 게 아닌 얼굴을 까놓고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부담인지. 난 얼굴 공개하는 게 싫어 파워 블로거도 때려치운 사람인데.
결국 선택한 방식은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거였다. 대상은 바로 부모님. 핑계는 이랬다. 내 얼굴이 나가면 엄마, 아빠의 지인들도 보게 될 수 있고, 혹여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할 공격을 비틀어 난데없이 부모님을 공격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럼 내 결정 때문에 엄마아빠 기분만 상하는 거잖아? 그러니 반대하면 안 할게. 지극히 미성숙하고 너무나 치사한 핑계였다. 엄마는 이렇게 일갈했다. 그런 얘기에 일일이 신경 쓸 거면 애초에 하질 말아라. 네가 하는 이야기의 대다수가 주류에 반하는 이야기인데 그럴 때마다 이럴래? 쪼그라든 용기를 객기로 채울만한 명언이었다. 역시 엄마는 날 다루는 방법을 잘 알아.
인터뷰 당일, 목을 축일 겸 사다 주신 바닐라 라떼를 고쳐 잡으며 컵이 미끄러운 건 내 손에 땀이 나서가 아니라 얼음이 녹아 생긴 물기 때문이라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어떤 식으로 말해도 의도한 바와 상관없는 맥락으로 소비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점을 감안해 나름대로 셀프 미디어 트레이닝을 한 보람이 있던 건지 (혼자 생각하기엔) 나름 괜찮게 답을 했다. 인터뷰 답변엔 캥거루족으로 살면서 내가 느낀 점, 또 내 지인들이 느낀 점을 통합해 최대한 거시적 관점에서 캥거루족이 사회에 등장하게 된 원인, 이점 등을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물론 안다. 애초에 개인적 경험이 기반되는 한 객관적인 내용이 될 수 없단 걸. 인터뷰를 하며 가장 노력했던 부분은 '캥거루족으로 묶이기엔 각자의 생활 방식과 이유가 다 다르고, 그만큼 다층적 관점에서 이 현상을 봐야 한다'는 걸 역설하는 일이었다. 공개가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만 개인적으로 인터뷰의 성패는 그걸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담당자에게 인터뷰를 수락한 이유를 중언부언 이야기했지만 솔직한 마음은 내가 한 이야기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브런치에 캥거루족 시리즈를 연재하며 전했던 메시지를, 지인들과 캥거루족의 삶을 성토하며 화냈던 순간들을, 캥거루족 예능에 대한 반응들을 리트윗 하고 좋아요를 눌렀던 시간들을. 그런 이야기를 잘 다듬어 공유할 수단이 있다면 기꺼이 힘을 실어 날아가도록 해야지. 캥거루족의 대표도 아닌 일원인 내가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큰 힘을 가질진 모르겠으나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인 줄 아는 사회에서 뭐라도 이야기할 거리가 있단 건 어쩌면 다행이기도 하다. 인터뷰 참여에 대한 감사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담당자분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기획할 당시 내 글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해준 순간은 그날 하루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줄 정도로 기쁘고 행복했다.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멋져 보이고 싶어 별 걱정 없이 수락한 척했지만 사실 이런 소심한 고군분투가 있었답니다. 다큐가 공개된다면 이 글은 성지가 될까, 악플이 달릴까. 어찌 됐든 괜찮다. 캥거루족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