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사랑을 빚지고 살아간다.
90년대 중반, 책 1권보다 1질 구매가 더 익숙할 시절. 독서를 좋아하던 나에게 엄마는 위인전 시리즈를 사주었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바다의 왕 장보고,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 여러 인물 중 내가 '존경하는 인물'칸에 꼬박꼬박 적어냈던 위인은 바로 유관순이었다. 유관순 위인전을 처음 읽을 때도, 반복해서 읽을 때도 유관순 열사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열일곱의 나이에 조국을 되찾기 위해 전선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그의 기개와 열정, 용기는 심장을 조이는 먹먹함과 벅참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유관순 열사가 목숨과 목청을 바쳐 외친 덕분에 독립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궁금했다. 유관순 열사는 왜 침묵하지 않았을까. 왜 본인의 목숨마저 바쳐가며 일제에 저항하고 조국의 독립을 외쳤을까. 이런 투쟁과 희생은 종교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석가모니는 모든 게 풍족하고 보장되어 있는 왕족의 삶을 버리고 고행을 자처했고, 예수는 산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은 몇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들을 위해서라면 본인의 삶도, 인생도 모두 헌납하는 신앙심 높은 신도들을 얻게 되었지만, 종알못이 함부로 짐작하기엔 애초에 그걸 바라고 희생했을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어차피 함부로 짐작한 생각이니 조금 더 나아가자면 나는 그게 사랑 때문이었다 생각한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탄압 아래 고통받는 가족들과 이웃을 사랑했고, 민족을 지켜줄 조국을 사랑했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이뿐만 아니라 탐욕에 눈이 먼 불쌍한 중생마저 사랑했고(애초에 연민은 사랑을 바탕으로 하기도 한다) 예수는 본인의 이름을 팔아 헛된 가르침을 하는 이들까지 사랑했다. 폭력적인 대우와 생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에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 참정권을 얻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하며 목에 호스를 꼽고 음식물을 투입하는 이들에게 저항한 여성들, 매질과 훈육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어린이 인권을 보호하려 노력한 사람들 등등 모두는 현세대의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후시대에 존재할 누군가가 본인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기 위한 마음으로 본인의 인생을 바치며 거리로 나섰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사랑이 아닐 리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만 잘 살길 바랐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불씨가 지펴질 수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그 사랑에 빚져 살아간다. 앞서 말했듯 독립된 자주국가에서 침략의 위협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 유럽이나 미국에 가도 이전처럼 '칭챙총' 소리를 듣거나 길도 걷지 못할 만큼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것(물론 인종차별은 아직도 잔재한다), 성보다는 인격체로 존중받는 것(역시 한참 멀었다), 어린이에 대한 차별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것 등등은 모두 누군가의 희생을 빚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송골매의 가사처럼 '그 누구의 사랑으로 여기에 서 있는가' 묻는다면 나는 그들의 이름을 이야기할 테다.
그럼 나는 이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뿐이란 생각이 든다. 후대에 살아갈 친구들을 위해. 사랑이라 표현하기엔 아직 작은 소망이다만 그냥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단 생각. 잘못된 상황을 잘못되었다고 앞장서 이야기할 줄 알고, 불의의 상황에 누군가 피해를 보고 있다면 그들을 보호하고 잘못된 관행들을 바꾸어야 한다 요구할 줄 알고, 약자가 오히려 조롱받는 시대에 다수의 목소리라고 옳은 게 아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총과 죽창을 목에 들이대며 위협하는 일본 순사들 앞에서도 태극기를 버리지 않은 유관순 열사만큼의 기개는 아니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 정도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어쩌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빚진 건 못 참는 성격에, 이렇게라도 그 사랑을 갚아간다면 나 역시도 좋은 세상에 살 수 있을 테니까. 아직 갚아갈 빚이 한참이다. 더 좋은 어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글을 쓰고 입을 열어야지. 그 한 단어, 한 마디로 내일이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