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에 동의하시는 분..? 저 입사시켜주시길.
살림에 관한 무수한 얘기 중 내가 특히 유념하는 말이 있다면 '집에서 하는 걸 보면 회사에서 일을 잘할지 못할지 보인다'는 말이다. 일전에 말했듯 살림은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꼼꼼함, 선후 관계를 파악한 후 효율적인 과정을 구상하는 일, 목적에 필요한 도구를 찾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 등을 꼽아보면 살림을 잘하는 능력이 곧 맡은 직무 혹은 몸 담고 있는 업계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일을 잘하는데 필요한 능력과 동일함을 깨닫게 된다. 언젠가 '김밥 하나를 말더라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만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매사에 완성도를 높이려는 태도와 자신감 역시 살림으로 기를 수 있는, 업무에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예를 들어 당신 앞에 다음과 같은 상황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해 보자. 아침 식사 후 쌓인 설거지, 어제 미뤄둔 빨래, 먼지가 굴러다니는 바닥. 이 세 가지 상황이 동시에 펼쳐진다면 어떤 걸 먼저 해야 할까? 생활 습관과 구체적 필요에 의해 조금씩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하는 편이다. 먼저 어제 미뤄둔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작동시킨 후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확인한다. 대략 30분의 시간이 남았다면 잠깐의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연 후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해결한다. 수납장이나 티비장 등 선반에 묻은 먼지들, 환기로 인해 들어온 꽃가루 등을 털고 문을 닫은 후 바닥 청소를 한다. 화장실 청소까지 마무리한 후 빨래가 끝나면 건조기에 널고 끝.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최대한 짧은 시간에 해결이 가능하며, 각자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 순서대로 일을 배열한 결과다(만약 설거지를 하기 전에 청소기를 돌리면 설거지하며 튀는 물방울을 따로 닦아야 하고, 빨래를 맨 나중에 돌리게 되면 모든 일이 끝나도 기다렸다가 빨래를 널어야 한다).
비슷한 예 한 가지 더. 개지 않은 이불, 건조기에 다 마른빨래, 바닥 청소. 세 가지가 있다면? 나는 보통 빨래를 갠 후 이불을 개고 바닥 청소를 한다. 빨래를 갤 때 주름을 펴기 위해 옷을 털면 나오는 먼지가 존재하기도 하고 옷장에 보관하기 위해 서랍을 열고 닫으며 나오는 먼지가 있다. 이렇게 나온 먼지를 묻은 이불을 한번 털면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진 먼지들을 쓸고 닦아내면 끝. 만일 볕이 좋은 날이라면 이참에 이불도 바싹 건조한 후 함께 정리하기도 한다. 순서는 위와 동일하게.
효율적 순서에 의해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유연성과 창의력을 요하는 살림 영역도 분명히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육아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적어도 유아가 집에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도.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물고 빨고 하는 이상 그 한가운데서 먼지 털기? 불가. 이불 정리? 의미 없음. 장난감 정리? 한번 시작하면 무한궤도에 빠질 걸. 이럴 땐 눈치껏 애들이 씻거나 화장실에 갔을 때 침구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고 애들이 식사할 때 구석에 방관된 장난감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정리하는 게 최선이다. 우뚝 선 성처럼 공고했던 청결의 기준은 애들 앞에 자주 무력해진다. 먼지 구덩이에서 다 같이 뒹구는 게 아니라면 높은 살림 수준을 요하는 것 자체가 강압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이렇게 살림해요!' 으스대듯 글을 쓴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다. 세상에 인구가 몇억인데 나보다 살림 잘하는 사람 없겠냐, 일 잘하는 사람 없겠냐. 살림을 일처럼 대하게 된 건 퇴사 후 2년이 지나면서 슬며시 엄습한 두려움 때문이다. 신입 연차도 아니고 웬만한 에이전시라면 과장급인 경력에, 내 업무 능력과 장단점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나 회사라는 커뮤니티에서 동떨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장점은 후퇴하고 단점만 커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다시 돌아가게 되어도 뭔갈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의심. 그런 게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를 때마다 싱크대에 혼자 서서 '매일 반복하는 설거지라면,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대체로는 스피드와 효율성(적은 노력으로 최상의 효과를!)을 제일 중시하지만 때론 이런 길도 시도해 보고 저런 방법도 도전해 보고. 그러다 보면 설거지 한 번이 뭔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적인 감상보다는 그 작은 행위가 주는 안위가 커서.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사실.
겨우 형태를 잡아도 옷장에 배달할 때쯤엔 액체괴물처럼 쏟아지는 폴리 소재 티셔츠를 바라본다. 이걸 차라리 옷걸이에 거는 게 나을까, 돌돌 말아 수건 형태로 쌓아두는 게 맞을까. 그러려면 옷장에 있던 다른 옷들도 같은 형식으로 정리를 해야 하는데 그만큼의 수고를 들일만큼 의미가 있을까,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빠르게 결론을 맺는다. 구김 없는 소재니 옷걸이에 한 개씩 걸 필요는 없고 돌돌 말아도 스웨터처럼 형태 유지하기엔 힘들다. 그럼 옷걸이에 최소한으로 접어서 겹쳐두면 옷 무게 때문에 훌렁 흘러내릴 일은 없을 거고 부피도 적게 차지할 테니 나이스. 이렇게 문제해결력이 +1 되었습니다. 다음 퀘스트는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