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커뮤니티는 필요할까?
무언가를 시작해 생활 습관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뭐가 있을까? 누군가는 다이어리에 행동 여부를 체크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새해 목표처럼 본인의 결정을 남들에게 알리고 책임감에 의무를 이어갈 수도 있다. 과거의 나 역시 쩌렁쩌렁 결심을 알리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어갔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혼자 묵묵히, 남들 모르게 조용히 뭔갈 하는 게 익숙해졌다. 비건식에 도전해 보겠다는 결심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처럼 루틴 혹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은 개인의 성향마다 다르겠으나 최근 지인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힌트를 얻었다.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 솔직히 말하면 내향형 인간으로 운동도 혼자 하는 헬스를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루틴을 만들기 위해 커뮤니티에 참여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되짚어보면 독서모임에도 '책을 너무 안 읽어서 강제로라도 읽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카톡 오픈 채팅방이든 어플이든 인증샷이나 정모를 통해 가지각색 챌린지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안 할 이유도 없다.
커뮤니티까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내향형인 성격 외에 다른 것도 있다. 일단.. 비건이 아니어도 갈 수 있나? 하는 망설임. 관념적으로 '완벽한' 비건들이 초대받은 장소에 '시도형' 비건으로서 가도 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컸다. 보통 참여자의 요건과 모임의 테마와 컨셉이 긴밀하게 연결된 경우가 많은데, 온전한 식단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커녕 애매하게 붕 뜬 상태로 존재하다 오긴 싫었다. 또 비건 모임, 비건 커뮤니티 어떤 키워드로 검색을 해도 '모임 가능한 비건 맛집' 포스팅이나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관련 기사만 나오니 어딜 가려해도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던 탓이다. 가려고 했는데요, 없었습니다..의 현실판이다.
개인적인 게 가장 대중적인 것이라고, 이런 아쉬움을 나만 느끼는 걸까? 하는 궁금증에 운영 중인 인스타그램에 질문 글을 올려보았다. 비건 커뮤니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니 '있긴 한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답변이 제일 많았고 '이미 참여하고 있으나 비건 커뮤니티는 많을수록 좋다'는 답변도 꽤 됐다. 나의 검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거였나 하는 한숨은 뒤로 하고. 비건 커뮤니티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많고, 현재 참여하는 사람도 이렇게 많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연이은 질문으로 비건 커뮤니티에는 비건만 와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에는 대부분의 인원이 '비건이 아니어도 좋다'는 답변을 선택했다. 표본 규모가 크진 않지만, 종합해 보면 비건 라이프를 영위하는 사람들은 커뮤니티에 관심도 있고, 실제로 참여도 하고 있으며 비건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어떤 비건 커뮤니티를 꿈꿔볼 수 있을까. 다시 개인적인 게 가장 대중적인 것이라는 명제에 기대어 내가 그리는 비건 커뮤니티를 그려본다. 내가 생각한 커뮤니티의 의의는 '나와 유사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거다. 회사나 학교처럼 강제로 한 집단에 쏟아부어진 게 아닌, 자발적인 의지를 갖고 참석한 사람들의 모임인만큼 가치관을 현실화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인 결은 비슷하면 좋겠다. 이걸 전제로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자. 일단 참가비로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비건 레시피를 공유했으면. 내가 이 레시피에 빠지게 된 계기가 뭔지, 만일 해당 재료에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걸로 대체할 수 있는지 아이디어까지 공유해 준다면 더 좋다. 새로운 잡식성 레시피야 쏟아지지만 새로고침이 더딘 비건 레시피 세계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좋겠지. 완벽한 비건이 아니어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함께 비건 관련 콘텐츠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있으면 좋겠다.
곱씹어보니 비건 커뮤니티에 가장 기대하는 건 폐쇄나 제한이 아닌 트임과 광장일지도 모른다. 보통 커뮤니티라고 하면 어떤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본인들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고 그 안에서 사용하는 은어나 공유하는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미지가 강한데, 내가 바라는 건 정반대다. 의향이 있고 지향점이 비슷하다면 누구든 와서 떠들고, 내가 가진 것들을 자유롭게 나누며 그 결과물이 밖으로 삐져나갈수록 좋다. 비건은 음침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신성시될 것도 아닌데 더 나눌수록, 쉽게 들어올 수 있을수록 만들면 부담도 없고 그 자체로 '즐김'이 될 수 있으니까.
커뮤니티가 DIY도 아닌데 본인이 찾는 이게 있겠어요?라고 묻는다면.. 없겠죠? 그럼 내가 만들어야 하나? 하는 질문에는 아직 쉬이 답을 못하겠다.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요, 하는 항변에는 쉽게 들어오도록 만들 수야 있는데.. 일단 주인장이 내향형이랍니다. 결국 아쉬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나는 결국 커뮤니티를 만들게 될까. 그 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얼굴을 그려본다. 그 안에는 댓글과 DM으로 느꼈던 '누군가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구나'하는 안도와 기쁨이 차있을까. 생각해 보니 좀 설레는 것 같기도.. 큰일 났다. 또 일을 벌이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