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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an 15. 2024

살 것도 없는데 백화점은 왜요

구경만 해도 즐겁잖아요.

어쩌면 나는 '백화점'의 개념을 몰랐을 때부터 백화점을 좋아했을지 모른다. 백화점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도 싶다. 디스플레이 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신제품들,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만 있는 화보나 광고 이미지 속 모습, 깔끔하고 청결하게 유지된 내부 시설과 고급스러운 향기나 갓 만들어진 맛있는 음식의 냄새가 따뜻하게 풍기는 곳. 들어가는 것엔 제약이 없지만 빈 손으로 나오면 큰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 곳. 그런 백화점을 나는 좋아한다.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백화점을 자주 들락날락했고, 지금도 그렇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기는 방식이 있다. 돈이 있을 때는 '살 능력은 충분히 있지만 그렇게 쉽게 지갑을 열지 않는 사람'으로 적당한 텐션을 유지하며 느긋하게 매장을 돌고, 돈이 없을 때는 요즘은 뭐가 유행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뭘 사는지 등을 공부하러 간다. 백화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시간낭비고 허세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백화점은 수많은 사람들이 종합소비예술을 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계산된 공간이다. 전문가를 고용해 각 브랜드의 외부 디스플레이 및 전반적인 톤 앤 매너를 꾸리고, 브랜드와 유통책인 백화점 사이의 정체성간 줄다리기도 자세히 보면 흥미롭게 느껴진다. 매 시즌마다 바뀌는 물품 간 배치는 분명 소비자들에게서 추출한 소비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일 테고, 신제품 혹은 베스트 셀링 제품으로 꼽히는 제품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모든 것을 한 큐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백화점이다.


방문 횟수나 체류시간에 비해 백화점에서 내가 사는 품목은 굉장히 한정적이고, 양도 그렇게 많지 않다. 사실 애초에 돈을 쓰는 항목이 엄청나게 한정적이기에. 바로 식료품과 책이다. 이전에 다른 글을 통해 작년 지출 내역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예측 가능한 내용이다. 옷, 스포츠, 화장품 매장 등은 구경만 한 채로 슥슥 지나쳐서 지하에 있는 서점에 간다. 한참 책을 읽고 위층 식료품 코너로 자리를 옮겨 먹고 싶었던 빵이나 식재료 등을 사 오는 단순한 패턴이다. 자주 가는 곳은 판교 현대백화점인데, 집에서 가기도 편하고 시설도 노후되지 않은 편이고 무엇보다 비정한 현대백화점의 판단에 의해 쉴 틈 없이 갈아치워지는(...) 식료품 코너가 마음에 든다. (물론 자영업자 분들 입장에서는 힘드시겠지요...) 지하에 교보문고와 핫트랙스도 있어서 책도 오랜 시간 읽고 문구류도 구경할 수 있다. 갈수록 소비 공간뿐만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을 지향하는 백화점의 트렌드에 맞춰 아트워크 매장에 걸린 작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뺄 수 없지. 판교가 경기도 내 신흥 부촌으로 부상하면서 판교 현백만 가도 에르메스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허다하다.(백화점에 에르메스 매장이 입점했다는 사실만으로 판교 소비층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일할 당시 평일에 연차를 쓰고 더현대에 가면 '남들 다 일하는 평일 오후에 한가롭게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는 이 사람들은 누군가'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곳도 역시 마찬가지다. 백수가 된 이후에 백화점에 가도 똑같이 놀란다. 전 세계 백화점 매출 1위 백화점이 있는 나라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건가..


갈수록 디자이너 브랜드로 시작해 시장을 선도하는 독립 브랜드들이 많아져 백화점의 영향력이 이전보다는 줄었다는 얘기들이 나왔었는데, 최근엔 더현대 등 화제성 있는 팝업 스토어를 운영하는 사례가 늘면서 이전보다 월등한 매출을 내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뭐 진작부터 있었던 유통공룡들이 그렇게 쉽사리 무너지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한다만. 매출에는 아주 미미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백화점 구경은 매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려면 백화점들이 계속 있어줘야 한다. VIP는 꿈도 안 꾸니 주차비나 좀 내려줬으면.


올해 유행은 이런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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