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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an 18. 2024

세상이 나를 T로 만든다

"그래서 어쩌라고" 소리가 목 끝까지 나오지만

"헐, 님 혹시 T인가요?"라는 말이 밈으로 통용되는 시대에 MBTI 중간 철자가 T인 사람들은 공감대 형성을 할 수 있는 기본적 감정조차 없는 ai 취급을 받는다. 길거리에 버려진 인형을 보고 F인 사람들이 "저 인형도 추억이 있을 텐데 저렇게 버려지다니 너무 슬프다"라며 감정이입을 하는 것을 T인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저건 길거리에 버리면 안 되고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처리해야지"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세상 비정한 냉혈한으로 본다. 나 역시 그랬지만, 이젠 그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T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예전에 한 연예인의 인터뷰를 보다가 그녀의 MBTI 중간 철자가 F에서 T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F로 살면서 모든 상황에 다 공감하다 보니 나 자신이 너무 피로해짐을 느꼈고, 그래서 점점 T가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해가 가는 말이다. 사실 F들은 자기 일,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들, 드라마 속 가상 인물 등등 모든 상황에 본인을 대입할 수 있다. 나만 해도 어제 유퀴즈를 보며 유연수 선수를 하반신 마비로 만든 음주운전자 이야기에 마치 내 얘기처럼 분노하고 그의 눈물에 눈물짓곤 했다. 세상을 이해하고 감정의 폭을 넓히는 데는 분명히 좋은 일이었겠지만 침대로 돌아오는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모든 것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니, 감정과 하루종일 반응한 신체가 피로해질 법도 하다.


이미 '나 정말 T 같은데'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목적이 있는 대화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상황은 이미 존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매듭지으면 되는 대화다. 그럼 '이러저러하니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면 깔끔하게 끝날 일인데, 누군가 '근데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고...' 하며 이야기를 하면 속에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질문이 트램펄린 탄 것처럼 펄쩍 뛰쳐나온다. 이미 다 고려된 조건들이고 어느 정도 결정의 방향도 정해진 것 같은데 뒤에 '...' 하면서 말끝을 흐리면 속에서 천불이 나기 시작한다. 정 아닐 것 같으면 대안을 제시를 하든가 본인의 입장을 확실히 했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얘기하면 알아서 해석을 하란 거야 뭐야 대체 어쩌라고 어쩌라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T가 되지 못한 사람으로 그런 내 입장을 전하는 것은 상당히 소프트한 태도를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요?"하고 싶지만 나는 정중하고, 세련된 어쩌구 성인이기 때문에 한껏 말랑한 태도로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는 바는 이해하겠지만 내 입장은 이러한데, 이렇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후, 그나마 마음 한편에 그득히 쌓였던 갑갑함을 좀 덜어낸 느낌이다. 완전히 개운하진 않지만 그래도 숨 쉴 공간은 좀 확보한 느낌이랄까. T인 분들은 이런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사시려나? 답답함을 느껴도 저건 저 사람 문제니까 상관 안 한다인 스탠스이신 걸까. T인 분들, 댓글로 실제 어떤지를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F로 사는 게 영 말짱 꽝이고 지난한 것은 아니다만 심적 여유를 기를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좀 힘들어지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 마음이 좁아져서 나도 꾸깃꾸깃 겨우 들어가는 공간인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포용하려다가 얼마 남지 않은 여백도 수축되어 버릴 수 있으니. 그냥 T로 사는 게 마음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내가 원한다고 그렇게 쉽게 바뀔 수도 없는 성향의 문제인데. 복잡하군. 단 하나 바라는 건 사회의 폭압에 두 손 두 발 들어 T로 바뀌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거다. 부디 내가 슬퍼할, 분노할, 염려할 문제가 줄어들어 이 세상의 F들이 잔존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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