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을 하는 우리는 12명이 한 팀인데, 그 인원에게 주어지는 귀하디 귀한 주차권이다.
주차권은 분기별로 혹은 반기별로 분배를 새롭게 한다. 특별히 건의가 없다면 기존에 주차권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이어서 사용하는데, 가끔 주차권을 새롭게 분배할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럴 때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미세하게 눈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예 받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를 한다. 그 대신 마음 편하게 비용과 약간의 물리적인 거리를 감수하고 회사건물 외부에 있는 유료주차장 정기권을 끊어서 사용한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기도 싫고 눈치 싸움 하는 것도 싫고 편하게 내 주차권은 내 돈으로 이용하겠다는 타입이다.
다른 누군가는 애초에 운전이 더 힘들고 귀찮다며 안받는다. 물론 주차권이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매일 차를 가져오자니 부담스럽고 가끔 사용할 건데 주차권을 달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말도 꺼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나면 이제 주차권이 필요한 사람들이 남는다. 대개 주차권 수량보다 주차권이 더 필요한 사람이 많기 마련이었다. 이럴 때는 관리자나 총무의 의견이 반영되어 사다리를 타기도 하고, 기타 출퇴근 여건을 고려해서 주차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내가 복직했을 때 같은 부서에는 주차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미 정해져있었다. (주로 거리가 애매하게 멀고대중교통 출퇴근이 불편한 지역) 이제 막 복직한 내가, 굳이 그 주차권 나도 달라며 분란을 만들진 않았다. 그것이 동료간의 배려이자 예의라고 생각했다.
두어 달 전 까지는...
여름즈음 구성 멤버가 바뀐 지금 부서.
주차권 분배를 다시 한다며 총무가 의견조사를 시작했다. 거기서, 회사에서 제법 가까운 거리에 사는 내가 당당히 손을 들었다. 내가 손을 들었다고 하자 아니, ㅇㅇ님은 회사 바로 앞에 살잖아요- 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당연히 회사 바로 앞에 살진 않았지만, 팀 사람들 중에선 거리가 제법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도 그 주차권 나도 달라며 뻔뻔하게도 손을 들었다. 총무가 주차권 2장에 나를 포함 4명이 손을 들자 난감해 했다.
"2장인데 4명이 신청하셔서,, 회사에서 집이 먼 순서대로 분배할까 하는데요."
"아니, 나는 가까이 살아도 둘째 어린이집 등원때문에 주차권이 꼭 필요한대요."
같은 단지엔 국공립 뿐이라 거길 보내지 못해서 옆도 아니고 옆-옆 아파트단지, 사거리 건너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 세살 둘째가 떠올랐다. 어른이 바쁘게 걸으면 10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두 돌이 지나 31개월이 넘은 둘째와 바쁜 아침에 걸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전거도 태워보고 달래고 달래서 유모차에 태우기도 하면서 등원을 하고 있었다. 한여름 장마비라도 내리면 차를 가지고 어린이집까지 갔다가, 다시 차를 집에 가져다 놓고 회사를 오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떠올랐고 이제 곧 겨울. 날도 춥고 눈이라도 쏟아지면 ......
나는 그렇게 주차권을 요구했고 2장 뿐인 주차권을 1달씩 교대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교대로 주차권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날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 이야길 전했다.
"주차권은 멀리 사는 사람들이 쓰는데, 욕하지 않겠어?
와.. 대단하네 와이프."
별로 말도 없고 조용한 편인 내가 그렇게까지 주차권을 받아왔다는 이야기에 적지 않게 놀란 듯 했다. 이여자가 정말로 아줌마가 다됐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놀랍긴 했다. 그럼에도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 요긴하게 쓰일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주차권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야 간신히-
회사 주차장에 차를 가져간 지 둘째 날.
오전 11시쯤 모르는 유선 번호가 뜨며 휴대폰이 울렸다. 스팸인가- 싶다가도 02-로 시작하는 것이 혹시 회사 업무 전화인가 싶어서 어쩔까-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조심스럽게,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이 이어졌다.
"박ㅇㅇ님 맞으시죠? 저... 여기 건물 주차 관제실인데요.
주차장에 혹시.... xx도xxxx 주차하셨죠?"
주차관제실?
혹시 차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깜짝 놀라 주차한것 맞다고 얼른 대답했다.
"아, 저.. ㅇㅇ님 주차하신 자리가 임원 고정석인데요..
지금 괜찮으시면 이동주차 가능하실까요?"
아......
그 순간 주차장 자리를 못찾아 한바퀴 돌다가 엘리베이터 출입구 바로 앞에 좋은 자리가 2개 나란히 비어있길래- 어 왠일이지? 횡재했네- 하며 서둘러 주차하고 내려 후다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아침의 일이 생각났다.
서둘러 대답했다.
"네, 네네. 제가 한 거 맞는데요. 임원자리인지 모르고.. 아 얼른 내려가서 차 옮길게요."
전화를 끊고나서야 부끄러움이 얼굴로 밀려 올라왔다. 서둘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멀리 하얀색 suv가 보였다.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제야 주차장 자리 위로임원전용자리임을 알리는번호표시판이 보였다. 내가 주차한 자리도, 엘리베이터 바로 앞임에도 비어있던 그 옆자리에도 전용석 번호가 걸려있었다.
임원이, 아니면 임원차량을 운전하는 기사분이 이 자리에 주차하러 왔다가 자리를 차지한 차를 보고 관제실로 연락을 한걸까?
차를 빼서 빈 자리를 찾으려고 주차장을 빙- 돌았다. 차를 가져온 첫 날 제대로 보지 못했던 높은 천장을 다시 한번 더 올려다보았다.건물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는 다 임원석, 업무용 고정석이거나 장애인 주차 구역이었다. 당연히 그 옆으로는 차가 이미 가득차있었다.
주차관제실 전화를 받고 내려가면서 부끄러웠고, 알 수 없는 처량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차를 옮겨서 주차하고 내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한참동안- 그런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뭐, 괜찮잖아.
한참을 상황을 되뇌여보다가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성공한 직장생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평범하디 평범한 주차권 한장 받기 힘든 말단 사원(사실은 만년 과장)으로 직장을 다니는나는 내 삶의 모습 그대로였다.
작년에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책이 있다. 아마존에서 12년 근속을 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하며 독립한 저자 박정준님의 [나는 아마존에서 미래를 다녔다]이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의 회사에서의 시간은 종착역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나의 기나긴 과정 중의 하나라고 말이다.
지금 내가 어떤 위치에 있건 나중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조금씩 깨우쳐가는 중인 것 같다. 언젠가는 이 피라미드를 통과하게 될 테니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