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e Yi의 찾아가는 영화관 뒷 이야기 - 지역>
찾아가는 영화관은 전국의 영화관이 없거나, 문화 소외지역에 찾아가 영화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좋은 취지에 더 좋은 점은 국가에서 무료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찾가영 2년. 13만km가 넘게 전국을 돌며 먹고, 보고, 느낀 여러 가지 점을 공유하려 Brave Yi의 찾아가는 영화관 뒷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아, 제 이름이 ‘이용감’이라 Brave Yi입니다.
요즘 먹고 살기 힘들어 헬조선을 외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전라도 강진 병영면에서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헬조선을 처음 외친 사람을 만났다. 심지어 그 사람은 조선인도 아니었다.
전라도 강진군의 병영면 초입에서 처음 만난 건 공사 중, 공사 중 팻말 뒤에 감춰진 조선 병영이었다. 병영면 이름도 그 때문인 듯 했다. 그 이외에는 별 다른 문화 시설이나, 번화가가 존재하지 않는 정말 깡촌이었다.
한 바퀴 마을을 둘러봤다. 병영면에서는 조선 시대 병영 뿐 아니라 독특한 기념관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하멜 기념관’.
이 하멜을 간단히 설명하면 17c에 일본으로 가다가 배가 제주도로 표류해서 한국에 온 네덜란드인이다. 제주도에 있다가 강진으로 끌려왔다. 이미 앞서 조선에 살았던 박연을 비롯한 네덜란드 인들은 조선 조정의 명령으로 하멜을 귀화시키려 했으나 하멜은 거절했다. 일본에 있던 하멜 동료가 조선에 억류당한 난민 하멜 소식을 들었고, 그를 구출해준다.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쓴다.
사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의 전부다. 뭐 조금 더 보태자면 하멜보다 이전에 박연을 비롯한 네덜란드인들이 조선에 표류해왔고, 그들은 조선에 귀화했던 것. 또 하나 보태면 하멜이 ‘하멜 표류기’를 쓴 건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일이라는 사실. 원래 몰랐는데 <알쓸신잡 1>에서 방송하는 걸 봤다.
내게 그저 하멜은 그 정도 인물이었다. 병영면을 둘러보며, 푸른 눈을 지닌 슬픈 표정의 외국인이 강가에 앉아 고개를 숙인 동상을 보기 전까지는.
병영면 내에 있는 안내문을 통해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이 전남 강진군으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봤다. 그렇게 끌려 온 하멜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건 은행나무였다.
옆에 있는 교회만큼이나 크고, 11월의 날카로운 햇살에 비친 황금빛 은행 나무 잎이 늘어선 이곳은 몽환적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마 옆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아동처럼 여겨졌다. 이런 저런 사진을 찍고 있는 데 아이들이 내가 ‘간첩’처럼 느껴졌는지 경계심을 지니며 뭐하는 사람인지를 물었다. 영화하고 동네 돌아다니는 사람이야. 대답했지만 이들은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뭐, 나도 이해한다. 간첩 나타났다고 신고 안 해서 다행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하멜이 이런 몽환적인 공간에서 생전 처음 보는 동양인들을 보며 한 때 서양에서 상상한 ‘금의 나라’(실제 15c까지만 해도 서양에서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있는 조선을 보물섬으로 상상했다)로 조선을 여겼으면 좋겠건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아무래도 조선인들보다는 덩치가 무자비하게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멜의 식비가 부담됐나 보다. 그래서 하멜에게는 ‘쌀’만 지급했다고 한다. 지난 달 위장 내시경을 포함한 건강 검진 한다고 하루 종일 ‘죽’만 먹은 적이 있다. 그 때의 느낌은 굉장히 끔찍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고기도 먹고, 또 고기도 먹고 해야 한다.
심지어 하멜은 튤립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격물치지를 알지 못하는 서양인을 교육의 힘으로 교화시키고 싶어 했으나 하멜은 한사코 거부했다. 조정에서는 이미 조선에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을 보내 하멜을 설득하려 했으나 하멜과 박연은 언어도 통하지 않았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박연이 조선에 너무 오래 살다보니 네덜란드 어를 까먹었다고...
끔찍한 날을 보낸 하멜. 고기를 먹기 위해서라도, 계속 고기 타령이니, 옷이라도 걸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하멜은 장에 나가서 네덜란드 나막신을 만들어서 팔았다. 나막신을 팔다가 안 되면 노래를 불렀다. 노래 부르면 항상 춤을 추는 민족답게 조선인들은 춤을 추라고 하멜에게 시켰을 거다. 하멜은 춤을 췄다. 춤을 추니 신기하다는 듯 강진 사람들은 그를 만졌을 거다. 큰 코, 금발. 아마도 고추는 어떻게 생겼냐며 성희롱도 당했을 거다.
얼마 전 뉴스 기사를 보니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한 맥아더를 모시는 점집도 있다고 했다. 마을의 유명한 무당들은 하멜의 머리카락, 털을 뽑아서 성물로 여기지 않았을까?
상상이 간다.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F*** 아시안”, “F*** 옐*우 몽*”라고 소리쳤을 외국인.
외침도 들렸다. 바로 위의 위 사진은 하멜이 장터에서 일하다가 힘들어서 강가를 보며 쉬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이다. 그는 강가에 앉아 그리 외치지 않았을 까?.
“F*** 헬조선!!”.
은행나무를 기념하듯 병영면 마을 곳곳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많았고, 마을 전체를 관광지로 띄우려는 지방 정부의 노력처럼 병영면 일부 지역의 돌담들은 옛날 양식의 담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400년 전 하멜이 있던 장소에는 한 어르신이 앉아 있었다. 400년 전 처음으로 ‘헬조선’을 외치던 외국인을 떠올리며 연신 웃음이 그치지 않는 상태로 나는 마을을 돌아다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어르신은 ‘간첩’으로 취급하며 나를 피했던 아동센터 아이들과는 달리 나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내게 묻는 듯 했다.
“미친 거시기여,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거여?”.
나는 무안해서 얼른 골목을 지나쳤다. 그리고 하멜을 떠올리니, 고기를 먹지 못한 외국인을 떠올리니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그 날 행사가 끝나고 여수로 이동했다. 뚝배기 불고기를 먹었다. 육지 고기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다음 날 유명한 ‘두꺼비 게장’집에 가서 바다 고기도 먹었다.
하멜 마을에 대해 쓰는 이 시간, 또 고기가 땡긴다.
여수 두꺼비 게장 또 가고 싶다. 거기, 진짜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