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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Jul 03. 2019

나는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스푸트니크의 연인>


나는 어떠한 사람일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누구와 어떠한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고 또, 때에 따라 변한다. 나는 어떠한 것에 가까운 사람이고,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고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는 지속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소개는 신중함이 필요하고 또 어렵다. 자기소개란의 몇 글자로 나를 증명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500자짜리 문항 몇 개에 나의 경험과 능력, 성향을 욱여넣고 10분 남짓한 면접으로 나를 평가받는다니. 내가 진정으로 평가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상처 받기 쉽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쓸데없이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경우를 몇 번이나 보았다.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그럴듯한 변명과 거짓말을 늘어놓는 경우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자기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류하고 싶어 졌다. 그보다는 오히려 나라는 존재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객관적 사실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때문인지 ...... 어느 시점부터 나는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긋게 되었다.
사람들이 입에 담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뭐랄까 고독한 인간이 되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속 화자의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 공감이 된다. 내가 언급하는 나의 모습에 얼마만큼 객관적인 진실이 있을까 하는 화자의 생각. 나는 무엇이고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언어로 정리하기가 어렵고, 표현을 하더라도 나의 주관이 많이 반영되어 있어서 이것이 과연 진실로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될는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진지하고 지속적인 고찰은 엄청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른 사람의 이중성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나는 어떤 이가 평소에 나는 00을 추구해/지지해라는 뜻을 지속적으로 내비치거나 어떤 대상을 크게 비난했는데 어느 날은 자신의 뜻과 반대되거나 자신 역시 비난의 대상과 다르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는 그 이중성, 언행불일치 (혹은 내로남불)를 잘 발견하는 편이고, 그럴 때면 실망감을 느낀다. 특히, 자신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고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양 비난의 대상을 매도할 때, 제삼자로서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저 사람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데 말이야.


물론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다. 오히려 각자 가진 흠이 많다. 나 역시 속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어떨 때는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싫어하는 이중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 역시 이중적일 것임을 알고 있으나 이중성을 지양하려고 한다. 언행에 신중을 기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다 보면 사안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게 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우유부단한 태도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또, 소설 속 화자처럼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나 자신 혹은 타인에 대해 당연히 주관적 관점으로 본다. 어느 정도의 자기 확신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강한 자기 확신을 표출하기에 앞서 타인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강한 자기 확신의 표출은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불쾌감을 줄 수 있기에 나와 생각이 다른 여러 생각도 들어보고 여러 번 고민해보는 것이 좋다.


인생은 어렵다. 뜻대로 되지도 않고 언제 어떠한 변수에 의해 급격하게 바뀌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진심이 통하기도 통하지 않기도 한다. 모두가 나와 같지가 않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처럼 나를 봐주지 않는다. 나의 관점으로 나와 세계를 이해해주지도 않는다.


결국 더불어 사는 사회 속에서 나는 일정 부분 적응을 해야 하며 사회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사람들이 이중적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관점에 따른 바람이고, 사람들이 어때야 하고 또 어땠으면 하는지에 대한 중요도는 사람과 사회마다 다르다. 대화를 하기 싫어 멀리하고 싶은 사람과도 소통을 해야 한다.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과도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야 한다. 오히려 이들을 통해 나는 무엇이고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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