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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Jul 08. 2020

문장에 대하여

서머싯 몸 에세이 <서밍 업>

한아름 꽃병에 꽂아 두었던 노란 장미가 더위에 바싹 말라 겨자색이 되었다. 마침 겨자색 아몬드 통이 손에 잡혀 열려고 했다. 둥글납작한 종이통이 한 번에 열리지 않아 위아래로 통통 튀기며 조금씩 열릴 때의 소리는 참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든다. 통에서 아몬드 한알을 쏙 빼서 입에 넣으면 유럽 어딘가 한 오래된 나무집에서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다가 아몬드를 한알 꺼내 먹으며 잠시 주의를 환기하고 아, 여기가 내 시공간이지 하고 순간 정신을 차리는 그런 상상에 빠졌다. 캘리포니아 삼나무로 만들었다는, 나무향이 은은하게 나는 연필을 손에 쥐고 향을 한번 또 맡으면서, 고개를 들면 천장이 삼각형의 구조가 드러나는 통나무집을 상상하였다. 온통 나무로 된 가구들 사이에서 아주 푹신한 커버가 씌워진 두툼하고 포근한 이불이 있는, 침실과 거실과 작업공간이 온통 뒤섞인 아늑한 공간 말이다.


주방에 가보니 가스렌지 위에 엄마가 해놓고 간 김치돼지등뼈찜이 있어 불을 켠다. 막 개운한 세수를 했더니 상쾌하다. 화장대에 앉아 솜에 토너를 묻힌다. 얼마 전에 토너가 다 떨어져서 산 토너이다. 친구가 자신의 스웨덴 친구가 부인과 함께 만들었다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스웨덴의 무슨 베리 성분이 들어 있는 토너이다. 친구에게 어떻냐고 메시지를 보내니"언니, 스웨덴을 믿고 한번 써보세요."라고 왔다. 화해 어플을 보니 유해성분도 0이길래 사봤는데 토너를 얼굴에 올릴 때마다 왠지 스웨덴의 추억과 감성이 느껴진다. '공주는 봉숭아 꽃처럼 톡 터지는 것 같아.' 잠자는 시간만 빼면 하루 종일 내 생각뿐이라고 말하는, 나를 공주라고 부르는 남자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감성이 전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감성적이야.


 작가는 스스로 계속 새로워져야만 비옥해질 수 있으며 영혼이 새로운 체험에 의해 꾸준히 풍요로워질 때만 자기 자신을 갱신할 수 있다.


서머싯 몸은 시대가 드러나는 글을 쓰라고 했는데, 하고 생각하며 한 손에 자두를 들고 눈으로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서머싯 몸은 자신이 월터 페이터, 오스카 와일드, 제레미 테일러처럼 묘사가 화려하고 장식적인 문체를 쓰지는 못해도 날카로운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청량감 있는 글을 쓴다고 생각했고, '분명함', '단순함', '좋은 소리'를 지향한 글을 썼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독자로서 나도 그렇게 느꼈고 그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 서머싯 몸은 문학, 철학, 신학을 두루 읽으며 통찰력을 길렀는데 그의 산문집 <서밍 업>이라는 글을 보면 좋은 글을 읽으며 베껴쓰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문장을 좋아했고, 쉽게 술술 읽히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콜레트의 글을 높게 평가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첫 직장의 나의 사수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침에 7개 신문을 읽고 스크랩하며, 좋은 글은 직접 베껴 쓰면서 글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나는 문학과 논문을 보며 글쓰기에 도움을 받은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서머싯 몸, D.H. 로렌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 글쓰기 선생님이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돌아다니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와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고,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을 담은 글을 읽으며 관찰을 통해 캐릭터와 스토리를 캐치하는 법을 배웠다. 그 시대에 묘사된 상황과 논쟁을 통해 다양한 시대 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릭터들이 펼치는 다양한 생각과 논쟁, 작가가 제시하는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생각을 확장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된다. 선과 악에 대한 생각, 큰 정부 혹은 작은 정부, 사회 개혁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 등을 읽으면서. 그래서 상황판단력이 부족하거나 타인의 마음과 분위기를 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좋겠다.


좋은 글과 문장에 노출되는 절대량이 많아지면 글을 보는 안목이 생긴다. 다른 사람은 읽고 무디게 넘어가는 것을 발견해낸다. 불필요한 문장과 논리의 흐름이 톡톡 잘 보이게 된다. 공감과 희열을 주는 문장이 눈에 들어오고 행복감을 느낀다. 문장이 주는 힘은 온몸에 에너지를 돌게 한다. 이러한 문장들은 작은 노트 가득 써두고 찾아본다.


서머싯 몸과 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를 반복해서 보지 않는다는 것. 그는 '처음 읽었을 때 내 머리에 남아 있는 것(비록 세부 사항은 잊는다 해도)이 영원한 자양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공감이 간다. 좋아하는 책이라도 두 번 세 번 읽는 체질은 아니다. 그때 읽은 그 감성과 영감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 좋다. 그 책에서 처음 받은 인상, 그 날것의 가치가 좋다. 발췌해서 다시 찾아보기는 해도 지루한 것이 싫어 새로운 책으로 넘어가고 싶다. 똑같은 영화나 책을 열 번씩 보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또, 나 역시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서머싯 몸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평범한, 그러나 관찰해보면 개성 있는 인간, 사물, 현상 등을 관찰하며 얻는 재미와 영감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편이다. 한편, 지난달에 읽은 <설국>이나 요즘 읽고 있는 책 D.H.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에 나오는 묘사가 화려한 문장들에 매혹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


엷은 분홍색 붓을 살짝 갖다 댄 듯한 살결

눈이 울릴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투명한 차가움을 새삼 발견하고 거울이 흐려지는 것을 닦아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선명한 자줏빛이 감도는 검정색으로

별무리가 바로 눈 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산 위에 쏟아져 내리는 가을 햇살

달은 마치 푸른얼음 속 칼날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산들은 적갈색으로 짙어져 석양을 받자 차가운 광물처럼 둔한 빛을 띠었다.

희미한 달밤보다 엷은 별빛인데도 그 어떤 보름달이 뜬 하늘보다 은하수는 환했고,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색채와 묘사가 너무 아름다워서 자연이 눈에 보일 듯이 그려지고, 묘사되는 색감의 하늘이 내 눈앞에 쏟아지는 것 같다. 은은한 희열감을 주는 문장들이다. 이러한 문장들은 평소에 자연을 바라볼 때나 자연의 변화를 관찰할 때 나도 자연을 감각적으로 느껴볼까 하는, 그전에는 무심코 여긴 감성을 심어주고, 이로 인해 또 다시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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