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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y 29. 2021

서울에서 까오삐약

삐약삐약


아직 장마철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장마철인 듯 비가 자주 온다. 어제는 출근길에 비가 너무 내려서 구두도 발도 원피스 끝자락도 다 젖었다. 흙탕물에 발이 빠져 발 등에 검은색 작은 돌 같은 게 잔뜩 묻었다. 비가 오니 일부러 좀 높은 굽을 신었는데 몇 걸음 안가 다 젖었다.


“어머, 뱀피무늬야? 예쁘네~ 키도 큰데 이런 걸 신으면 어떡해.” 하고 10살 이상 차이나는 동료들은 나를 귀여워해 준다.

“아, 비가 와서요. 높으면 발이 안 젖을 줄 알고.”

“뒤에 다 뚫렸는데.” 슬링백이다.


블러드 문이 뜬다고 해서 8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집 밖에 나갔는데 달은커녕 부-연 하늘만 깜깜하게 있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동료들에게 블러드 문이 뜰 거라고 알려줬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달이 안 보인다고 했다. 달이 동그랗게 뜬 하늘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순간적으로 공기와 냄새가 달라진 기분이 들면서 추억도 떠오르고 갑자기 어떤 미래가 생각나기도 한다. 하늘을 쳐다봤을 때 그 순간적인 몽롱함과 붕 뜬 느낌이 좋다.


까오삐약

비가 굵게 우중충하게 내리는 날에 라오스 국수를 먹으러 갔다. 서울 용산. 까오삐약이라는 라오스 국수를 사랑한다. 우리나라에 베트남, 태국 쌀국수는 많이 파는데 도대체 까오삐약은 안 파는 거야? 하고 알아보던 중 작년 즈음 서울에 라오스 국수를 파는 집을 검색해서 알아냈다. 거리가 멀어 못 가다가 마음먹고 갔다.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 만날 수 있는 라오스 국숫집.


라오스에서는 우연히 먹게 된 까오삐약에 빠져 기회만 되면 먹었다. 특히 돼지갈비가 들어있는 까오삐약이 좋았다. 더운 나라지만 이열치열처럼 뜨끈하게 먹으면 기분이 좋았다. 까오삐약의 면은 칼국수 면 같이 도톰한 굵기에 우동처럼 쫀-득하다. 쌀로 만들어 그런지 쫀쫀하고 쫀득하여 우리나라의 국수에서는 맛보지 못한 식감이다. 정말 좋아한다.


도가니 국수
와, 우리 동네에 까오삐약 팔면
자주 와서 먹고 싶어.

용산의 라오스 국숫집에는 라오스 맥주도 팔고 비엔티엔을 찾은 관광객들이 꼭 먹고 온다는 도가니 국수도 판다. 도가니 국수는 일반 쌀국수 면이고 육수는 태국식 쌀국수 같은 맛이 난다. 태국식 쌀국수는 내가 느끼기에 약간 검게 진하고 한방 향이 느껴진다. 서울에서 파는 까오삐약은 닭 육수였다. 닭 육수를 별로 안 좋아해서 닭 칼국수도 안 먹는데 이 국물은 맛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음식 사진을   올리는데 행복한 기억으로 까오삐약 사진을 올리니 국수 그릇이 화려하고 쨍하다며 댓글이 달렸다. 싸구려 플라스틱 핑크색 젓가락도 마음에 든다. 라오스 감성이 아니면서 라오스 감성 같은 느낌. 라오스에서는 까오삐약 2-3  정도 하는데.



기회가 되면 라오스에 또 가고 싶다. 길도 다 알고 아는 사람도 많고 호텔도 물가도 싸고. 푹 쉬다 오기에 좋다. 나중에 결혼을 하면 육아 휴직을 내서 애기랑 와서 몇 달 있다 가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더워서 애기가 고생을 할 것 같다. 아, 그럼 애기를 맡기고 오면 되겠나? 하니 그럼 좀 너무한 것 같다.


라오스에 가서 쉬며 나는 미래에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것과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청년기에는, 아니 다른 세대도 그럴까, 일 년 뒤도 내다보기 어렵다. 작년의 나도 재작년의 내가 내다본 것과 다른 일과 경험을 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고. 갑자기 외국인과 결혼하여 혼혈 애기를 낳을 수도 있고, 일을 그만두고 외국에 나가서 살 수도 있다.


요즘에는 코로나가 끝나면 석사 휴직을 내고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한다. 예술과 문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기도 하고, 아니다 이건 학문이면 지루할 것 같아 그냥 일상에서 즐기자.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 평화학을 공부하고 싶기도 하고, 평화애호국으로 소프트파워를 잘 갖추고 있는 캐나다에서 중견국 연구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영어가 아닌 제2외국어를 마스터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공부가 많아 선택을 못하겠다고 하니 선배 동료가 자기 동기가 싱가폴에서 공공정책을 공부하고 왔는데 괜찮았다더라고 말해줬다. 그러면서 우리가 공공 분야에 있으니 공공 정책을 공부해봐도 괜찮을 거 같다고.


원래 대학원을 가고 싶어서 돈을 모아야겠어서 취업을 했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공부보다 일이 재밌기도 하고 매일 예쁜 옷 입고 회사 나가는 맛도 있다. 또 저축을 기를 쓰고 하지는 않아 돈도 잘 안 모이는 것 같고 모은 돈은 결혼할 때 쓰거나 내 집 장만을 위해 필요할 것 같아진다. 집에 돈이 많아서 이런 생각을 안 하면 좋을 텐데, 똑같이 돈을 벌어도 부잣집 애들은 저축하거나 학자금 대출을 갚지 않고 다 소비하던데 부럽다, 하고. 물려받을 돈이 많거나 돈을 잘 버는 남자를 만나면 내가 하고 싶은 걸 별 어려움 없이 하고 살 수 있을까? 초이상적인 걸까.


주변에 결혼하는 동료들이 많다. 사내커플도 세네 커플 주르륵, 옆 부서들도 올해 잔뜩 결혼했다. 오늘 그리고 다음 주에도 동기들이 결혼한다. 별로 친하진 않아서 감각이 없지만 뭔가 신기하다. 결혼도 많이 하고 나처럼 결혼을 하고 싶다는 적극적인 목표의식도 누구를 만나고 싶은 별 열정도 없는 사람들도 많다.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결혼이 목표인 사람들을 보면 공감이 안된다.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그래도 언젠가 아기는 낳고 싶다. 예전엔 너무 먼 얘기 같고 아기를 낳는다는 상상도 와닿지 않았다. 낳을 때는 아파서 무섭고 몸이 예민하니 임신하면 아프고 힘들 걱정, 그리고 온전히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두려움이 있을 것 같아 아기를 안 낳겠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아기는 나의 친한 친구가 될 것 같다. 나를 잘 도와줄 것 같고 위로가 될 것 같아 언젠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 외국에 나가고 싶으니 빨리 백신을 맞아야 되나. 외국인 친구들 인스타 스토리에 마스크를 벗고 생활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 열 살 이상 차이나는 동료들은 부모님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거나 예약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오전에 맞으러 갔다고 걱정돼서 정시 퇴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동료는 자기는 직구를 해서라도 화이자를 맞고 싶다며, 다들 아스트라제네카에 대한 우려를 나누었다. 백신,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아서 아직까진 공감이 안 되는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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