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광안리&영도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남동생의 면도기는 내가 화장실만 들어가면 떨어진다. 이번에는 왠지 떨어지려는 기미가 빨리 느껴져서 떨어질 때 재빨리 손으로 잡아 제자리에 올려두었다. “아.” 손바닥 안쪽이 쓸려 얼른 수건으로 꾹 눌렀다. 처음엔 아프지 않았는데 서서히 아프다가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몸이 둥글게 말릴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뻐얼건 피가 손바닥 길을 따라 흘렀다.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부장님, 저 금요일에 연차 좀 쓰겠습니다.” 근처에 부장님이 다가오시길래 월요일 아침부터 선언했다. “그러세요,” 흔쾌히 기분 좋은 말투로 말하다가,
“금요일? 아 우리 경평 발표날이네.” 하고 갸우뚱하시길래, “아, 예약해 놓은 게 있어서요.”라고 말했더니 “시험 보기 싫어서 가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셨다. “아, 겸사겸사요.” 마음을 읽혔다.
하긴 너무 명백했다. 일 년에 한 번 회사에서 회사 대표로 어떤 이유로 시험을 봐야 하는 게 있는데 보통 부서의 막내들이 걸린다. 굳이 누가 봐야 하는 건 아니어서 아무나 봐도 되지만 담당 부서에서는 직원들에게 폐를 끼치는 거여서 그런지 만만한 막내들을 선정한다. 물론 내가 그날 자리에 없으면 다른 사람이 지정된다.
기분 전환하러 여행을 가고 싶었다. 석가탄신일을 끼고 5일을 쉬었는데 그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여행을 가지 못했다. 부산에는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친해진 친구도 살고, 창원에서 일할 때 친해진 동료들도 있다. 언제 갈까 고민하다가 겸사겸사 시험도 피하고 지친 마음도 쉴까 싶어 떠나기로 했다.
srt는 카드사 할인이 안돼서 ktx 예약을 했는데 ktx는 너무 좁아서 다리가 아프다. 그런데다 밧데리 충전해야 하는데 복도 쪽에 앉은 사람에게는 콘센트도 없다. 돌아올 때는 srt를 타기로 한다. 역시나 널찍하고 좋다. 맨 뒷자리는 있는대로 젖힐 수 있는 공간도 있고.
Я увликаюсь пилатесом(나는 필라테스에 빠져있어). 최근에 필라테스도 시작하고 러시아어를 계속 배우고 싶어 짤막한 회화 인강도 듣고 있다. 지루하니 음악도 듣다가 러시아어도 듣다가. 부산역 차이나타운을 걷다가 러시아 골목이 있는 걸 보았다. 러시아 식당들도 몇 군데 되고 상점도 있다. 러시아 식빵을 하나 사 왔다. 상점의 중년 여성에게 이 빵 시큼한 거 맞냐고 물어봤는데 시냐는 표현을 못 알아들었다. 러시아어로 했어야 하나. 러시아어로 시다가 뭐지.
요즘 나는 정신적 휴식이 필요했다. 회사에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자세한 얘기는 하기 그렇지만 요약하면 특이하고 맹랑해서. 나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얘기하는지 그 내용보다도, 가십 삼아 대화에 올려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그 행태가 별로다. 나도 다른 사람을 두고 그럴 때가 있을 것 같다고 돌아본다. 다른 사람이 하면 기분 나쁘다고 하는 행동을 나는 하지 말아야지. 화제가 되고 주목받는 것을 병적으로 안 좋아하고 가끔 심장이 두근거리고 사람이 무서워지지만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상 피해 가기 어렵다.
“악의를 품은 자들과 더이상 말을 할 수조차 없더라도, 굴욕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말고 묵묵히 그들을 섬기라.
사람들의 악행이 분노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비애로 그대 마음을 어지럽히고, 심지어 그 악한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더라도, 그런 감정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라.
자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위대한 것인즉, 오로지 의로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인 기쁨이 그것이로다. 지체 높은 자들도, 힘있는 자들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지혜롭고 언제나 의젓하도록 하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한시 반쯤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역에서 나오자마자 여행하는 기분이 넘쳐흘렀다. 부산역에서 보이는 도심 풍경들은 너무나 낯설었다. 멀리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도 보이고 눈 앞에 보이는 호텔 모텔들과 노란색 번호판을 달고 달리는 부산 차들, 내가 사는 곳과 다른 느낌의 고층 빌딩들, 숨을 들이쉬자 들어오는 약간 짠내가 느껴지는 듯한 낯선 공기. 바람이 불자 치마가 다리에 달라붙었다. 비가 그쳤다. 선선하다.
혼자서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타니 더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이 낯설었고, 현지인은 어떤지 구경을 하는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지하철을 탈 때는 다른 사람을 잘 보지 않았는데, 여기와서는 다른 사람을 구경하게 되다니 확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순간적으로 일본에 온 것 같기도 했고 예기치 않게 모스크바에 갇혀 혼자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을 힐끗힐끗 구경하던 것도 떠올랐다. 혼자 여행 오랜만이야.
뜬금없이 Ballroom dance를 항상 볼륨댄스라고 발음하던 영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중년의 여자 선생님이셨다. 왜 문득 떠오른 건지. 정신이 환기된 느낌이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양치를 했다. 화장실이 급하지 않았었는데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발을 씻었다. 방을 둘러보았다. 하얗게 빳빳하게 펴진 침대를 보니 더럽히고 싶지가 않았다. 막상 누워서 엉망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긴 하다. 가격에 비해 침대도 널찍하고 조명도 감각적이었다. 커튼을 쳐 밖을 내다봤다. 바다 뷰는 아니지만 괜찮았다. 그냥 해운대에서 자고 싶었어. 친구가 30분 정도 더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좀 뒹굴뒹굴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사진 찍으며 놀았다. 옷을 다 벗고 사진을 찍었다. 혼자 있으니 유머러스한 사진을 찍는 게 재미있다. 뒷모습 사진도 찍고 누워있는 사진도 찍고. 인체는 아름답다. 재밌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해운대에서 친구를 만나 카페에 갔다가 야경을 보러 광안리에 갔다. 바게트 호텔이라는 검색해서 찾은 색감 예쁜 카페를 가보고 싶었는데 가보니 없어진 것 같았다. 호크니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인테리어였는데 아쉬웠다. 특별한 카페를 찾기 귀찮았다. 친구가 안내한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 갔다. 4시에 만났는데 스타벅스에서 수다를 떠니 벌써 8시가 되었다. 일 년 반 만에 친구를 만나니 할 말이 많았다.
친구가 먼저 헤어진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다. 왜 헤어졌냐고 어떤 점이 좋았고 이상형과는 어떤 점이 달랐냐고 물었다. 친구를 만나지 않은 일 년 반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길래 예전에 찍었던, 그가 귀엽게 나온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니가 찍어준 거야?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 찍어주는 너의 애정이 잔뜩 느껴져.” 난 잘 모르겠는데. 그의 애정만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소리로 나오는 내 웃음소리와 목소리 때문인지 시선 때문인지, 친구는 그렇게 느꼈다.
광안리로 자리를 옮겼는데도 11시가 넘도록 바다를 보면서 얘기를 하였다. 광안대교의 조명은 색이 달라졌다. 우리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녔고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고 바다도 바라보았다. 아련하고 아득했다.
“진짜 현실적이다.” 우리의 이별 얘기를 들은 친구가 말했다. 모든 걸 다 말할 순 없었지만 처음으로 이런 얘기를 친구와 나누었다. 공감도 해주고 이해도 해주어 마음이 편했다. “모든 게 돈이 문제네.” 돈이 문제인 것 같기도 사람이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복합적이다. “그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가. 그 사람에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야.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
“휴. 요즘 사람들은 다 악에 차있는 것 같아.” 회사 얘기도 여러 얘기들도 두루두루 생각나는 대로 했다. 일방이 대화를 독점하는 것이 아닌 관계여서 좋다. 내가 천천히 말해도 잘 들어주고 내 뜻처럼 호응해준다. 친구는 악에 차있다는 내 말이 인상적이라며 곱씹었다.
다음날 만난 동료는 타로를 봐주었다. 내가 공허한 상태라고 했다. 볼 때마다 타로가 꽤 맞는 편이어서 재미있다. 어떻게 그렇게 상황을 잘 설명하는 카드들이 나오는지, 카페의 조명도 몽롱하고 세련되서 더 오묘한 느낌이 든다.
같이 일하던 여자 동료는 나와 친했던 남자 동료랑 같이 놀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같이 셋이 보기로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동기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친해서 자주 몇 시간씩 통화도 하고 내 고민도 나누고 나에게 조언도 해주는 동료여서 주변에서 동기 중에 어떤 사람이 일 잘하고 괜찮냐고 물으면 항상 추천한다. 그런데 오늘 여행으로 그 추천을 거두어야 할 것 같다.
사실 그는 지난주쯤에 어떤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하던 나에게 관리자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조언을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 문장을 반복했다. 나는 관리자처럼 행동한 게 아닌데 자기가 정답인 양 말했다. 내가 위로인지 지적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별로 만나기 싫었다. 그는 우리 셋이 만든 단체방에서 여행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내심 그가 오지 않기를 바랬지만 오고 싶다는데 그간의 우정이 있고 나에게 악의는 없는 사람이니 오지 말라고 하기가 그랬다.
그는 우리랑 상의도 없이 그린카를 빌렸다며 우리가 가기로 한 동선이 아닌 다른 동선을 짜서 링크를 보내주었다. 아마 내가 흰여울문화마을을 가보고 싶은데 그곳은 멀다고 하니 가려고 했나 보다. 딱히 차가 필요 없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미 빌렸다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에코백에 갈아입을 상의 하나와 간단한 샘플 로션 몇개만 들고와서 짐도 정말 가벼워서 지하철을 타고 다녀도 괜찮은데. 결과적으로는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쓴 채 몸과 마음만 불편했다.
다음날 그의 차를 탔다. 옆자리에는 타고 싶지 않아 친한 여자 동료한테 길 안내를 핑계로 옆에 타라고 했다. 가관이었다. 그는 나만큼 왕초보 운전이었다. 영도 쪽으로 가야 하는데 갑자기 기장 방향으로 도로에 올라탔다. 1시 반 도착인데 2시가 넘어 도착했다. 끼어들기를 못해서 계속 다른 도로를 탔다. 주차를 해야 하는데 아예 주차를 할 줄 몰랐다. 주차를 하다 옆 차를 박을 뻔했다. 언덕이 심한 구불구불한 영도의 고갯길에서는 속도를 내지 못해 뒤차가 계속 빵빵거렸다. 내리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내리막길에서 후진을 해야 했는데 R이 아닌 D로 놓고 액셀을 밟아 앞차를 박을 뻔했다. 운전을 잘하는 여자 동료가 대신하겠다고 해도 계속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주차도 안 되는 수준의 운전실력이면 왜 위험하게 다른 사람을 태우고 자신 있게 운전을 자처한 거야. 그의 판단력과 태도에 너무 화가 났다. 불안해하며 타야 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 이 시간이 운전 연습하는 시간이 아니에요.” 날카롭게 말했지만 그는 장난인 줄 알았는지 웃을 뿐이었다. 눈치도 말도 없었다. 평소에 말수가 극도로 없는 사람인데, 입을 꾹 다문 것도 꼴 보기 싫었다. 마음속으로 절교를 선언했다.
부네치아라고 하는 곳에 가보고 싶었는데, 막상 별로라고 하기도 하고 거리가 멀었다. 다음엔 다대포에서 노을을 보고싶다. 어쩌다 그와 왔던 카페에 또오게 되었다. 근처에 다른 카페를 가려고 왔다가 자리가 없어 또 갔는데, 또 간대로 또 좋았다. 어쩐지 이 길을 와 본 것 같더니만.
흰여울문화마을은 빈티지하고 예쁜 색감의 골목에 포카리스웨트에 나올 만한 뷰가 좋았다.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고 아기자기한 상점들도, 구경할만한 서점과 뷰가 예쁜 카페들이 많다. 날이 더워 팬티까지 땀에 젖었다. 얇은 스커트를 입길 잘했다. 우리처럼 구경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중간중간 널린 이불과 색색의 빨래들이 예뻐 보였다. 색감이 널려있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찍고 바다도 구경했다. 하루 연차 내고 왔을 뿐인데 거한 여행을 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피곤했지만 기분 전환이 됐다.
같이 여행하면 예쁜 장소에서 사진도 많이 찍고 다양한 곳을 갈 수 있지만, 부산역에 도착해서 호텔을 찾아갈 때까지 혼자 느끼던 여행자의 기분이 너무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