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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Aug 29. 2021

몽상-새롭고 오묘한 환각제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몽상가는 부질없이 마치 재 속을 헤집듯 자신의 낡은 몽상을 뒤적거립니다.

나는 지금 언젠가 과거에 나름대로 행복을 느꼈던 장소들을 기억해내곤 일정한 시간에 그곳을 방문하길 좋아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과거에 맞추어 현재를 꾸미는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마치 그림자처럼 까닭 없이, 목적도 없이 우울하고 침울하게 뻬쩨르부르그의 골목골목,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바로 1년 전, 바로 이때,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지금처럼 우울하게 지금처럼 고독하게 이 보도를 걷고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망상에서 좀 나와. 현실을 살아. 친구가 내게 말했다. 망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되냐고. 나는 몽상가라구! 망상이라는 말이 듣기에 거북하지만 듣는 사람이 망상 같다는데 그런가 보다 해야지 뭐. 몽상, 망상, 공상. 비슷비슷한 말 같은데 뉘앙스가 다르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몽상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이 아닌 여러 생각을 하는 것이지 그곳에 빠져 현실과 분간하지 못하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 나의 가정과 세계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망상에 빠져있다고 느낀다. 뭘 그렇게 망상이라고 규정하는지 모르겠다. 저 사람의 생각은 망상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자기 세계관 속에서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요, 자기 현실에서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면 망상으로 취급하는 것도 오만이다.


틀에 갇힌 사람들, 세계관이 좁다고 해야 하나, 대화를 할 때 벽처럼 느껴지는 사람들과는 서로 이해를 하지 못한다. S와 N의 차이라고 이분법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게 그렇다고 같은 N끼리도 세계관이 천차만별이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멸의 밤이 무한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찰나처럼 지나가고 새벽의 분홍빛 햇살이 온통 창문에 어른거릴 때, 우리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여명이 환상적인 아련한 빛으로 휑뎅그러한 방을 비출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읽으면 뻬쩨르부르그의 골목골목을 몽상하며 걷는 느낌이 든다. 러시아 하면 가을처럼 쌀쌀한 여름 날씨가 상상된다. 8월의 네덜란드와 스웨덴은 22도 정도로 가디건이나 얇은 외투를 입어야 했다. 그래서 왠지 러시아도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내 상상 속의 뻬쩨르부르는 대낮처럼 환하지만 트렌치코트 속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숙이고 움츠리며 걷는 거리는 왠지 회색빛으로 음침하고 파리하다. 건물 곳곳 간간히 하얀색 노란색 빛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따라한 듯한 몽글한 건물들을 비추니 거대한 도시에도 순간순간 따뜻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파마로 밤색으로 얼룩덜룩해진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였다. 나는 검은색, 남색, 버건디색과 같은 차가운 색이 잘 어울린다. 흑발이 된 머리를 말리며 거울을 보니 얼굴이 한층 더 맑고 깨끗해 보인다. 자주 가던 미용실이 지난달에 문을 닫았다.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던 아줌마는 문을 연지 일 년 만에 문을 닫았다. 평소 돈을 벌 의지가 별로 없어 보였어서 그런지 코로나나 불경기 탓은 아닌 것 같다.


온갖 책들과 옷이 쌓여있는 정리되지 않은 내 공간이 좋다. 얼룩덜룩 낡고 누런 벽과 이 공간이 가끔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내 또래의 여성들이 내 행거를 부러워할 것 같다. 질 좋은 소재와 딱 떨어지는 실루엣, 아름다운 곡선과 어깨 디테일이 살아있다. 직장 여성들이 입고 싶어하는 브랜드의 감각있는 옷들이 걸려있다. 어깨가 강조되었달지, 골반이 강조된다든지 아방가르드한 옷들도 간간히 섞여있다. 옷을 줄이지 않아 그 브랜드에서 만든 그 사이즈를 똑 떨어지게 입을 수 있는게 내 몸의 장점이다.


회사 가기 싫을 때면 누워서 헹거의 옷들을 바라본다. 뭘 입을지 고민한다. 주말엔 쇼핑을 해야 월요일에 출근을 하고 싶어진다. 이번 주말엔 에고이스트에서 옷을 잔뜩 샀다. 코트도 사고 자켓도 사고 겨울 잠바도 샀다. 가슴 위 어깨가 레이스로 시스루하게 드러나는 글래머러스한 라인의 베이지색 골지 니트도 샀다. 에고이스트는 옷들이 글래머러스하면서도 재치있는, 그러면서도 커리어우먼 같아서 마음에 든다. 나의 특이한 성격과 개성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아 요즘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이다.


공공기관 직원으로서의 숙명이기도 한 게,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 너무 많다. 잡다하게 하라는 것이 많고, 일상적으로 하는 일 중에서도 조금의 오타로도 기관의 점수를 깎으니 살 떨린다. 정부 산하기관으로서 연관된 정부 부처의 사무관, 주무관들은 갑질을 한다. 똑같은 일을 두 번 세 번 시키고, 본인들의 스케줄에 따라 언제까지 해서 내라고 하는데 하루 이틀 기한은 양반이고 2-3시간 안에 달라고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면 우리는 또 우리 직원들을 쪼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 왜 해야 되냐, 저번에 한 거 아니냐, 하고. 안 그래도 다른 할 일 많은데 제발 이런 것 좀 시키지 말고 가만히 좀 놔둬라, 현장의 상황을 조금도 생각을 안 하고 기획을 하냐 등등.


나는 차장님에게 이러다가 자기 집 빨래까지 시키는 거 아니에요? 하고 농담을 하며 푸념을 털어놓았다. 안쓰러운 표정과 함께 돌아오는 답변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갑을 구조라는, 옛날에는 더 했다, 어느 직원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서 안 하고 버텼다가 그 정부 과장이 주말에 간부에게 전화를 해서 지랄발광을 했다 등등. 그리고 산하기관별로도 어디는 산하기관이 정부보다 더 큰 소리를 내는 곳도 있다고.


아, 이래서 고시 패스를 해야 되나 싶기도 했다. 시간 들여서 공부 안 하고 취업의 길을 선택했으면 갑을 구조를 따라야지 어쩌겠는가(그런데 요즘은 취업 문이 워낙 좁고 힘들어서 오히려 다시 고시나 공무원 시험 준비로 돌아가는 사례도 많다. 나를 괴롭혔던 주무관이 우리 회사 입사 시험을 보면 합격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주변 친구들이 거의 다 공무원이어서 친구들한테 종종 말한다. 산하기관 관리할 때 갑질 하지 말라고. 당연하게 내놓으라고 하지 말고 요청하고 부탁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그래도 공공기관에서 일하기로 선택했으면 어쩌겠는가.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지. 나는 그 대가로 30년 자리 보전과 매년 오르는 월급, 그리고 여러 복지혜택을 받으니까. 1시간으로 연차도 쪼개서 쓰고 이제는 30분 단위로도 연차를 쓸 수 있게 해 주니까. 육아휴직도 아직 과도기이긴 하지만 2-3년 자유롭게 쓰는 문화이고, 임신하면 매일 두 시간씩 단축근무를 할 수 있는 등 누리는 복지혜택이 많은데 이런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합리적인 대안 제시 없이 성과 채우기가 힘들다, 그만 좀 시켜라, 하고 하소연만 하는 것도 별로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받는 월급만큼은 해야 하지 않는가.


담당자라는 이유로 회의 중 나의 잘못이 아닌 문제가 생겼을 때, 위로부터 저연차 직원인 나에게 옷을 벗어라 마라 하는 말을 들을 때는 우리 조직이 폭력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담당자로서 관리를 제대로 못한 책임이라고 한다. 그런 오류나 문제도 앞서 생각해서 예방했어야 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더 꼼꼼히 살피고 체크했어야 된다는 것, 이런 일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까지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번 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압박을 받는다. 내 자리 하나쯤은 내놓을 수 있다. 그건 큰 문제가 안된다. 내가 자리를 내놔서 회의가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한다고 하는데도 기본적으로 성격이 꼼꼼하지 않고 대충 하는 성격인 나는 사무직이 나랑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민폐를 끼칠 바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적성과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아닌가 싶은 생각을 자주 한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이 안될  숨막히고 옥죈다. 잘못과 책임을 두둔하는 눈빛과 원망이 숨막힌다. 돈을 적게 벌고 안정적이지 않더라도, 맞지 않는 일을 하다 앞으로  다른 폐를 끼칠  있는 것보다 나을 것도 같다.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이면 어떤가. 백수 시절엔  달에 30 원으로도 살았다. , 마음 편한  제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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