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구원을 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상태를 즐기고 있었다. 가끔씩만 어떤 슬픔에 가슴이 아리는 듯할 때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리움이나 회한과 같이 잠시 스쳐가는 찡한 감정으로…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밝은 밤에는 은빛이던 달이 깜깜해지자 푸스스하게 금빛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쨍한 모양의 초승달을 사랑하는데, 반달이 되기 전의 이런 애매한 모양의 달을 오래 쳐다보게될 지 몰랐다. 그날따라 그 애매한 모양을 한 달의 금색의 아우라가 진했다. 한동안 달을 계속 쳐다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 이 달을 쳐다보는 사람들 간에는 순간적으로 영혼의 뒤섞임이 있을까? 1Q84의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평행세계에서도 서로의 기운을 느낄 수도 있고. 달은 하나니까. 하나라는게 신기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너무 노랗지는 않고 상아 색인 달이 갑자기 숨어버렸다. 오랜만에 달을 보니 너무 예뻤다. 아름다우면서 순수한, 그러면서도 무관심하고 냉철한 느낌이다. 그래, 나는 가슴이 찌르르하고 아픈데, 너는 내 기분이 즐겁든 아프든 아무 관심이 없지.
백수였을 때 자주 추리닝을 입고 산책을 나왔던 풀숲에 오니 백수가 된 것 같다. 백수 시절의 나와 지금 추리닝을 입고 주말 내내 뒹굴뒹굴하는 나는 똑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오히려 백수였을 때 마음에 더 여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 자신의 컨텐츠에 자신감이 있었다. 백수일 때 나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뒹굴뒹굴 늦게 일어나 추리닝을 입고 동네를 돌기도 하고, 거의 하루 종일 장편소설을 붙잡고 읽고 글도 쓰고 영화도 봤다. 왓챠에서 웬만한 화면 예쁘고 소소한 감성이 있는 영화는 다 봤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쉬었다.
호롱호롱호롱. 호롱호롱호롱
챠~~~~~ 챠~~~~~ 챠~~~~~~
샤르르르 샤르르르 샤르르르
쁘르릉 쁘르르르르르르르릉
벌레들의 소리는 정말 다양한데, 그 소리는 또 규칙적이다. 가만히 있으면 소리도 다양하고 냄새도 좋다. 밤 냄새 풀 냄새는 달콤하다. 향이 진하다. 몽롱해서 시선이 자꾸 아래로 향한다. 제멋대로 난 잡초 무더기가 계속 시야에 보인다. 몽롱하고 취한 것 같으면서도 벌레에 물릴까 봐 한 번씩 다리끼리 비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기분이 정말 좋다. 이대로 눈 감고 눕고 싶어.
왼쪽 오른쪽 어깨가 균형이 맞지 않은지 오른쪽 어깨로 브라끈이 계속 내려와 올리기를 반복한다. 아, 왜 자꾸 오른쪽만 내려오지. 그러다 나는 얼굴에 크림을 바를 때 왼쪽 뺨부터 바르는 습관이 생각났다. 코피도 왼쪽에서만 난다 나는. 근데 얼마 전부터 왠지 모르게 일부러 오른쪽부터 바르기 시작했다. 그런지 며칠 됐다. 그냥 그러고 싶다.
토마스 만의 단편을 단숨에 읽었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을 해! 싶은 어휘와 문장이 많다. 예를 들면, ‘세련되지만 빈곤해진 자신을 보았다’랄지, ‘불안하고 달콤한 느낌이 섞인 즐거운 마음’, ‘진실하고도 서투르면서 둔하고 굼뜬 감정’, ‘고요한 황홀감’, ‘우울한 질투심’, ‘은밀하고도 애타는 그리움’, ‘싱그럽고 감미로운 봄의 숨결이 흘러 들어와’, ‘아름다움에 취해 노곤한 행복감을 느끼며’, ‘우울한 창조력이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면서’와 같이. 번역도 잘된 거겠지? 아름다운 우리말을 골라 쓴 번역가의 센스도, 우리말끼리의 조화와 글자의 아름다움 모두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