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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Jul 18. 2021

새콤달콤 같은 사람

<방랑자들>

주방 바닥의 타일 틈새로 물이 스며들고, 전기 콘센트에서는 더운 김이 뿜어져 나온다. 책들은 습기 때문에 부풀어 오른다. 책을 한 권 펼쳐 보니 활자들이 마치 화장이 얼룩지듯 뭉개지고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아기자기하고 과장된 장면으로 가득한 트렌디한 뮤직비디오 한 장면이 떠오르는 글이다. 요즘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이라는 책과 <빛 혹은 그림자>라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 받은 17명의 작가들의 단편 소설을 엮은 책을 읽고 있다. 나는 평소에 좋았던 글을 노트에 적어 놓는데, 요즘엔 무지에서 산 회색 펜과 새로 갈색 잉크를 넣은 만년필을 쓰고 있다.


<방랑자들>이라는 책은 대문호들의 작품들처럼 엄청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크나큰 영감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흔한 여행 에세이가 주는 가벼운 깨달음과 실망감에 비하면 여행과 떠남의 감성, 인생에 대한 한 작가의 깊이가 담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작가가 방랑, 여행을 주제로 여행하면서 든 생각과 상상력, 심리, 여행 중 만난 사람들, 관찰한 것 등을 담은 짤막한 글을 모아놓은 소설이다. ‘꺼져가는 불빛들이 공기를 앗아가 숨쉬기가 힘들다’랄지,  ‘ 그 사이 포도밭은 강렬한 진녹색을 머금는다. 초록빛 줄무늬의 바닷속에 두 사내에 형상이 무력하게 서있다.’ ‘그러는 사이 잔뜩 부풀어 올랐단 태양이 포도밭 너머로 저물고, 그들이 언덕에 올라섰을 즈음에는 태양과 맞닿는다.’하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묘사도 좋고, ‘마치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지금 다르게 흐른다. 끈적끈적하고 맵싸하게, 병렬형으로. 새하얀 구름 뒤에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갑자기 더워진다.’ 하는 묘사의 몽롱한 감성도 마음에 든다.

회색화분에 빨간색 안시리움을 심었다(룰루)

장마철이 시작될 양 날씨 앱에 비로 가득 찼지만 막상 몇 주째 비는 오지 않았다. 잠깐잠깐 거센 소나기만 왔다간 듯하다. 아침에 머리를 덜 말린 채로 나가면 목에 달라붙어 땀과 엉기는 느낌이 싫다. 엄지발톱이 절반 부분부터 크게 뜯어져 덜렁거렸다. 이불의 실에라도 닿으면 아악, 하며 아프게 뜯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손톱깎기로 조심스럽게 잘랐다. 요즘 나는 회색에 꽂혀 엄지발톱에도 회색 매니큐어를 칠해놓았다. 페디큐어를 받아볼까, 했는데 찾아보니 5만 원 정도 했다. 와, 이 돈이면 예쁜 립스틱을 하나 더 사지, 하면서 아까운 생각이 들어 올리브영에서 5천 원도 안 하는 매니큐어를 하나 샀다.


퇴근하고 집에 누워 러시아어 동영상 강의를 가끔 듣는다. С вас всего~ (쓰 바스 f씨보)를 따라 읽고 있더니 I am going to make you proud라는 뜻 모르는 문장이 쓰여있는 나시 원피스를 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던 엄마가 뭘 씨봉씨봉거리냐면서 이상하게 따라 했다. 우리 엄마는 혀가 굳어서 그렇다는데 어떠한 외국어든 따라 하는 발음이 이상해서 웃기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는데 욕설을 포함하여 한국어만 정말 잘한다.

레이먼드 카버를 읽어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새로 오신 우리 부서 부장님은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부서원들이 내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부장님은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라고요. 서머싯 몸도 좋아하고요,라고 했더니, 아 로렌스, 로렌스를 좋아하는구나. 혹시 레이먼드 카버는? 아, 아직 안 읽어봤어요.


사실 로렌스는 책도 워낙 장편이고 잘 알려진 작가도 아니어서 말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로렌스 책을 좋아한다고 하니 내가 어떤 글을 좋아하는지 금방 파악을 하는 사람을 만나니 신기하고 기뻤다. 물론 그런척하는 건지 어쩐지 많이 안겪어봐서 모른다. 내가 포르투갈에서 사 온 코르크로 만든 카드지갑을 들고 다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도 포르투에서 너무 좋았다며 포르투갈을 여행해본 사람들끼리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나는 페소아를 좋아해서 페소아를 따라 리스본 여행한 여행을 하니 부장님과 페소아와 관련된 얘기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라는 책은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책이다. 찾아보니 번역이 별로 안 좋다는 글이 있어 원서로 주문했다. 샐리 루니의 <Normal People>도 읽어보고 싶어 함께 주문했다.


요즘 필라테스에 푹 빠져있다. 지금까지 7:1로 9번 참여했는데 갈 때마다 모두 다른 동작으로 배웠다. 매번 다양한 동작으로 계속 자세와 기구를 바꿔가며 다양한 근육을 움직이니 정말 재미있다. 숨이 가쁠 만큼 무거운 운동이 아니면서도 운동이 되는 뻐근한 느낌이 좋다. 거울을 보면 세세하게 근육이 움직이는 게 보여 신기하다. 내 코어와 기초체력이 점점 좋아질 거란, 그리고 자세가 교정될 거란 기대도 하면서.


“우리 00 대리님은 새콤달콤 같아.”라고 여자 차장님이 내게 말했다. 사람들과 밀당을 잘한다면서. “우와 그 말 진짜 좋아요!” 새콤달콤한 사람 같다는 표현이 좋았다. 지루하지 않은 다채로운 사람이 된 느낌.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내가 너무 이성적이어서(나는 T형 인간) 연애를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말투는 어린아이 같은데 생각하는 게 40대인 자기랑 비슷한 것 같다고.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결혼할 거 아니면 안 만나려고요. 귀찮고요. 시간낭비 같기도 하고요.”라고 했더니 차장님은 “에이, 그러면 안돼~~” 했다.


다른 동료가 T와 F의 차이라면서 질문을 했다. 친구가 “나 너무 우울해서 화분을 샀어.”라고 말할 때 뭐라고 할 거냐고. 어째서, 어떻게 우울하냐고 그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는 사람이 F형 인간이고 왜 화분을 샀는지 등 화분에 집중하면 T형 인간이라고 했다. 나는 만일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면 “어떤 화분 샀는데?”라고 물어볼 것 같다. 왜 우울한지 그 사람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 우울한 걸 나한테 굳이 왜 말하는지 모르겠다.


공감을 하기에 귀찮아하는 성격이지만 감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엊그제는 한 여자 동료에게 다가가 그 동료가 뭔가 유목민 같다고 말했다. 뜬금없었는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시야에 들어온 그를 보며 상상 속에 빠졌다. 그 동료가 일에 열중하며 슬리퍼 속 맨발을 꺼내 의자 위에 올려놓고 일하는 모습이 자유분방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는 까무잡잡하고 어깨를 넘는 까만 생머리를 가졌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오지에 살거나 유목민이었던 소녀가 도시에 나와 사무직에 취업해서 정착해서 일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빵 터지며 안 그래도 몽골 여행 갔을 때 사람들이 자기한테만 바로 몽골어로 말을 했다고 했다. 말투가 사랑스러운 편이어서 그런지 전화를 받으며 응대하는 모습이 오지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귀여운 소녀 같았다. 목소리는 얇지 않고 중음 정도인데 말투가 겸손한 듯 카리스마가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어려운 일을 맡았는데도 정신을 부여잡고 야무지게 해 나가는 정글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하였다.


컵이 통통하네
사랑스러운 능소화

동료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스타벅스에 갔다. 한 동료가 자기는 그란데를 시켰는데 사이즈가 똑같은 거 같다며 잘못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톨 사이즈와 비교해보니 크기가 비슷해 보였다. 그란데가 맞다고 하자 커피가 담긴 일회용 컵을 유심히 보더니 음, 컵이 통통하네.라고 말했다. 컵이 통통하다는 표현에 전율이 일었다. 오왓, 컵을 통통하다고 표현하다니! 통통이라니, 통통. 통통하다는 표현이 컵과 너무나 매치가 안되면서도 묘사가 훌륭하고 정확했다. 너무 예술적인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심코 나온 자신의 표현을 내가 왜 특별하다고 느끼는지에 별다른 공감을 못했다. 다만 내가 예술적이라고 표현해준 것에 기쁨을 느낄 뿐이었다.



하늘이 맑고 깨끗하다. 새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풍부하게 떠있다. 구름의 밑바닥은 회색으로 음영이 되어있다. 다행히 습하지는 않다. 햇빛은 모든 걸 말리는 것 같다. 아이섀도우를 사러 백화점에 갔었다. 여름에 화장을 하기 무거워서 간단하게 음영 쉐도우 하나만 얇게 깔고 마스카라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내 음영 섀도우는 카키색이나 노랑끼가 도는 황토색, 갈색 계열뿐이어서 약간 회색이 도는 옅은 섀도우를 사고 싶었다. 색조를 파는 곳을 모두 돌았는데 원하는 색을 못 찾았다.


옷을 보다가 블라우스처럼 입을 수 있는 반팔자켓을 발견했다. 팔이 접히는 부분까지 오는 길이에 팔부분과 어깨에 셔링이 우아하고 유니크하게 잡혀 있었고, 단추도 고급스러웠다. 처음에 쥐색을 보고 너무 예뻐서 입어봤는데, 얼굴이 죽어 보였다. 같은 디자인인데 약간 붉은 끼가 도는 어두운 밤색을 입어봤더니 얼굴이 살았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쉽게 보기 어려운 색이어서 마음에 든다. 위아래 정장으로 입어보니 세련되고 소재도 시원해 결국 한 벌로 샀다. 줄이거나 늘릴 필요 없이 몸에 꼭 맞았다. 한 벌 사놓으면 유용할 것 같았다.


짜안

어릴 때부터 갖춰 입는 걸 좋아했다. 대학생 때부터 검정색 테일러드 자켓을 모든 옷에 올려 입었다. 친구들이 오늘도 결혼식에 가냐고 물었다. 요즘엔 회사에 배꼽 위로 올라오는 통이 넓은 주황색, 겨자색 하이웨이스트 바지를 자주 입고 간다. 남색 원피스도 좋아한다. 남색은 고급스러운 색이다. 회사를 안 갈 때는 노브라에 잘 티가 나지 않는 검은 티셔츠와 흰색 크록스를 신고 다닌다. 인스타그램의 ootd들을 보면 베이지색 니트 나시에도 노브라로 다니는데 아름다워보인다. 외국이라면 그렇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니트 나시에 노브라 조합은 세련되고 우아해 보인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려고 하다가 자전거를 발견했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이미 뒷목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끈이랑 선글라스가 있었으면. 집으로 오는 길은 횡단보도가 많았다. 계속 달려서 오면 시원할 텐데 계속 빨간불이었다. 나는 횡단보도에서는 꼭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건넌다. 창원에서 횡단보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큰길을 건너다 신호위반을 하고 달려오는 차에 치일 뻔 한 이후로 찻길은 아찔하다. 그 하얀 소형차에 타 있던 아줌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빨간불에 혼자 달리고 있고, 횡단보도에 사람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왔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죄책감 없이 그대로 코앞까지 달려와 나는 간신히 피했고, 그대로 지나갔다. 사이코패스인가.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전거에서 내려 주저앉았다. 식물인간이나 장애인이 될 뻔했어.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가다가 페달에 오른쪽 다리가 긁혔다. 아악, 하고 아팠다. 다리가 점점 까지더니 집에 와서 보니 크게 부풀어있다. 나는 항상 조심성이 없다. 조금만 다쳐도 아파하면서 까지거나 다치면 그럼 그 뒤에 생각하지 뭐, 이런 마인드이다. 집에 도착했다. 후덥지근하다. 땀에 원피스가 다 젖었다. 얼른 에어컨을 켰다. 냉장고에 넣어둔 큰 페트병에 든 시원한 삼다수를 꺼내 컵에 가득 따랐다. 갈아입을 팬티와 잠옷을 들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다친 부위에 마데카솔을 발랐다. 잠옷이 반바지라 안 묻어서 다행이다. 태블릿을 열어 어제 방영한 보이스 4를 틀었다. 나는 보이스의 충실한 고객이다. 이진욱이 나오던 보이스 때가 내용도 더 흥미진진하고 좋았는데. 그래도 보이스를 안 볼 순 없다. 재미있다. 저녁엔 크림 파스타를 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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