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것보다 좋다
공부하는 게 너무 재밌고 좋아서
회사에 돌아가기 싫어요!
오랜만에 직장 상사를 만나 밥을 먹으며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계단식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학교에 다니고 책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쌓는 게 너무 좋다고 말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는 삶도 좋다. 회사원이었던 것을 다 까먹었다. “자기는 박사까지 해. 잘할 거야!” 하고 이왕 공부하는 거 박사까지 하라고 독려한다. “모르겠어요 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죠.” 오랜만에 동료를 만나 이 생각 저 생각 나누니 좋았다. 나는 간부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친구나 동료라는 생각으로 수평적으로 대한다. 어른으로서 존중 하되 직장 상사라고 어렵게 대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감정은 편하게 얘기한다. 그도 내가 아 하면 아로 알아듣고 어하면 어로 알아듣는다. 내가 어를 아로 속이거나 숨겨서 말하지 않는 사람인 걸 안다. 짧은 시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며 다시 만나기로, 다음에 만났을 땐 도스토예프스키 문학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개강 4주 차가 되었다. 3월은 날씨가 매주 달라진다. 첫째 주는 추웠다가, 둘째 주는 가벼워졌다가, 셋째 주는 다시 쌀쌀해졌고 4주 차는 다행히 적당히 봄 날씨가 되었다. 캠퍼스의 나무들은 아직 황량하다. 캠퍼스에 여러 포스터가 붙어 있고 개강과 동시에 여러 포럼, 행사, 자원봉사 모집, 마음 챙김 프로그램 안내 등 메일을 보다 보면 대학 생활이라는 게 약간은 느껴진다.
학교를 가는 첫날은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오랜만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개강하여 학교 가는 마음 가짐이 기억이 안 났다. 학부에서 다니던 학교가 아니다 보니 확실히 생소한 기분이 든다. 강의실을 잘 찾아가려고 일정 앱에 잘 써 놓았다. 목마를 것 같아서 텀블러를 가져왔는데 이놈의 학교가 아무리 찾아도 정수기가 없다. 경비 아저씨한테 창문으로 똑똑. 노크한 뒤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건물에는 정수기가 없나요? 하니 난감해하면서도 아 신참이구나, 하는 이해의 눈빛과 함께 학생들이 보통 저기서 떠, 하고 알려주셨다.
첫 수업은 긴장하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편하고 쉽고 재미있었다. 첫 주는 교수님들이 수업을 짧게 끝내주셔서 좋았다. 개괄적인 것을 설명해 주시는데 진짜 알기 쉽게 설명해 줘서 너무 재미있다. 사회과학을 설명하는데 철학, 역사를 기반으로 요즘의 시사, 사회 현상을 곁들여 들으니 풍부하고 입체적이다. 영감이 된다. 교과서를 혼자 읽을 때는 그냥 활자로서 밋밋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이 알기 쉬운 설명과 함께 입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분야를 오래 공부하고 많이 읽고 고민해 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알기 쉽게 이해할까, 하고 받아들이기 쉽게 설명하니 괜히 교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수업이 그렇다.
교과서를 두 권 사야 되는데 책 값이 비싸다. 회사 다닐 때는 회사에서 몇 십만 원 한도 내에서 교보문고에서 자유롭게 책을 샀는데 휴직해서 이제 아쉬워졌다. 그래도 전공 필수고 논자시 시험을 봐야 하는 과목이어서 한국어 번역본을 샀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이 번역이 영 안 좋아서 결국 전자책으로 원서를 읽고 있다. 3과목 중 2과목이 원서를 읽어야 하는 수업이다. 번역본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쉽지만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한국어처럼 속독은 안돼서 오래 걸린다. 수업을 안 가는 날에는 한 과목씩 날을 정해 챕터를 복습한다.
유럽에서 미국인 교수님 수업을 들을 때는 교수님이 올려주는 논문 5-6개를 수업 전에 읽고 가지 않으면 아예 수업 논의에 낄 수가 없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읽어가느라 애를 먹었다. 교수님이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는 게 아니라 주제와 질문을 계속 던지며 생각을 유도하고 학생들은 손을 들어 자기 생각을 말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이 자기 생각은 리딩을 했다는 전제로 나올 수 있는 생각들이다. 강제 성장으로 리딩 속도도 빨라지고 손들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문화가 나에게도 배게 되었다. 그걸 생각하고 대학원이니 수업이 빡셀 것을 우려하고 갔는데 여기는 미리 공부하고 가지 않고 수업을 들어도 되고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교과서를 읽으며 복습하는 식의 방식이 충분하다.
아이패드 프로를 사길 잘했다. 화면이 커서 플렉슬이라는 어플로 두쪽보기로 형광펜을 치면서 읽고 옆에 한국어로 간단한 요약도 적으면서 읽기에 너무 좋다. 아이패드를 처음 써보는데 생각보다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는다. 전기 잡아먹는 귀신이다. 배터리 하니 생각났는데 강의실에 자리마다 충전기가 있는데 충전 코드를 꽂지 않고 usb선으로도 충전이 된다. 여기까진 뭐 공항도 그러니까, 그런데 아이패드 충전용 타입 꽂는 칸도 있어 놀랐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아이패드 충전기를 꽂아놓고 아이펜슬로 필기를 하는데 자꾸 손바닥 인식이 되어 찍찍 줄이 거지는 거다. 당황하며 아 이게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벌써 맛이 갔나, 집에 가는 길에 강남역을 들려야 하나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한 걱정을 하고 쉬는 시간에 이리저리 네이버 검색이며 유튜브 검색을 하는데 충전기에 꽂고 애플 펜슬을 쓰면 그렇단다. 휴, 가슴을 쓸어내렸다.
2주 차까지는 털레털레 가방 들고 학교 다니고 만든 학생증도 찾고 교내에서 파스타도 먹어보고 돈까스도 먹어보고 새로움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아.. 이 학생증에 대해서도 또 짜증 나는 일이 있다. 난 후불교통카드 기능을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지갑에 넣으면 자꾸 교통카드 한 장만 찍으라고 읽힌다. 짜증 나서 학생증 연동 카드인 우리 카드 해지해 버렸는데 그래도 계속 읽힌다. 학생증을 지갑 속에서 빼서 따로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러면 우리 카드 기능 없는 학생증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학교에선 가급적 우리은행 학생증을 만드는 게 편한지 안내도 미흡하고 이제 와서 다시 만들어 다시 등록하고 찾고 하는 과정이 피곤하다. 애초에 체크카드 기능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고객 편의성이 떨어진다.
5513과 5511을 자꾸 헷갈려 버스를 두 번을 잘못 탔다. 그래도 이젠 확실히 알고 만원 버스를 대비해 다른 방법도 구상해서 다니고 있다. 수업도 빡세지 않고 휴직하고 집에만 있다가 예쁜 옷을 꺼내 입고 학교 가는 재미도 있다. 지하철에서 사람도 구경하고 외국인들도 보면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다만 퇴근길 2호선은 헬이다. 너무 만원 지하철이어서 숨이 막힌다. 힘을 안 주고 나에게 기대거나 백팩을 앞으로 메지 않고 뒤로 메서 살벌한 무기로 사람들을 툭툭 치며 공격하는 사람들이 너무 짜증 난다. 그래서 저녁 수업을 갈 때는 그냥 집에서 좀 일찍 출발해 학교 가서 공부를 한다.
그런데 3주 차가 되니 갑자기 논문 프로포절을 한 장으로 써서 내라고 한다. p들에게 계획을 짜야 되는 상황은 너무 스트레스다. 논문 없이 5학기 다니는 타교 대학원들과 달리 여긴 모든 수업이 논문 중심이라는 걸 체감하는 중. 기말 논문 과제를 왜 벌써 정해서 내라는 거야. 아직 배우지도 않았는데. 난 배우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고 나중에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주일 만에 써서 내라고 하니 발등에 불 떨어졌다. 제법 논리적이고 기존에 없는 연구여야 하겠지, 하고 과제 제출 요건에 맞는 논문을 검색하고자 도서관에 들어간다. 하루는 벤치마킹 할 괜찮은 논문들을 10개 정도 추리고 하루는 이 중에 내가 이용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읽어보며 국문과 영문 5개로 추린다. 영문 학회지 논문은 한국 논문의 추세보다 다양하고 범주가 넓고 새로운 사례가 많다. 읽다 보면 너무 재밌어서 이런 세계가 있었나 싶다. 주제를 정하고 나면 또 난관이 있다. 이 개념을 변수로 넣으려면 어떻게 측정할지 다른 논문들은 어떻게 측정했는지를 또 막 찾아본다. 어떤 이론을 가져다가 설명했는지 찾고 끝도 없다. 조절효과 매개효과는 또 무슨 차이지, 유튜브를 또 막 찾으면 박사라는 사람들이 차분차분히 설명해주는 유튜브들이 있다.
고시공부 중인 후배에게 일주일 동안 막막했지만 괜찮은 연구 주제를 발견했다고 그래도 고시공부보단 훨씬 쉽더라,라고 말하니 어휴 그렇게 광범위한 데서 찾아야 하고 자유도가 높으면 자긴 더 힘들다고 말한다. 이거다 싶은 나의 관심사를 찾으면 희열이 있다. 체력이 약해 빠른 시간에 끝내는 걸 좋아해 집중력이 엄청 높은 나는 4시간을 안 움직이고 앉아서 읽고 찾는다. 그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허리가 엄청 아프다.
우리 캠퍼스는 노을 맛집이다. 해 지는 시간에 하늘을 보면 정말 멋있다. 앞으로 캠퍼스에 벚꽃이 피면 더 아름다워질 것 같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를 말할 때 우리 학교라는 표현이 저절로 나오는데 아직 이 새로운 학교에는 소속감이 없다. 그래도 이 캠퍼스는 예전에 친구들과 가끔 오던 곳이어서 낯설지 않다. 집에 가는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는 학생들 얼굴을 보니 굉장히 앳되다. 학부생들은 나랑은 열다섯 살 정도 차이 나겠지?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