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4)
그랜드 인도네시아로 가려고 지도를 보는데 오토바이로도 30-40분 정도 걸린다. Kota역에서 빨간색 1번 라인을 타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다. Kota 지역은 원래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구시가지가 있는 곳이다. 그럼 그랩을 타고 코타역까지만 가서 대중교통을 타고 가보자. 대중교통은 3.5K로 300원 정도다. 시간은 어차피 할 게 없어서 널럴하니 몸이 조금만 고생하면 최저가 여행이 가능하다.
쇼핑몰에서 나왔는데 그랩을 잡기에 위치가 애매하다. 여긴 들어왔던 곳이 아니네. 좀 걸어 나와서 길에서 잡아서 타볼까. 근데 또 갑자기 인터넷이 안된다. 한 100미터쯤 앞에 그랩 옷을 입은 오토바이가 서있다. 내가 먼저 가서 Jakarta Kota 가고 싶다고 말한다. 남자 오토바이 기사가 아니라 그 근처에 그늘막에 서 있는 공격적으로 활달한 아줌마가 나를 맞이한다. 자카르타 코타, 다 너희 단어인데 왜 못 알아들어.. 구글맵을 보여주며 얼마냐고 물으니 15k라고 말한다. 인터넷이 안돼서 그랩과 비교할 순 없지만 내 생각에 그냥 10분 거리에 천 원 정도면 괜찮다. 10분에 30불 부르던 괌 공항 택시도 있지 않은가(하도 충격적이어서 매 여행 때마다 생각남...).
아줌마는 다 끝나고 기사한테 15k를 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알겠다고 고맙다고 인사한 뒤 올라탄다. 자기가 영업도 안 하고 고객을 유치했는데 젊은 오토바이 기사는 뾰루퉁하고 소극적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친절한 사람만 봐서만 그런지 우붓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렸는데 내릴 때 땡큐, 하고 목소리를 듣고는 남자인 줄 알았던 그랩 기사와 이 둘이 가장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카르타 코타에 도착해서 앞으로 한 시간이나 가야 하니 그전에 뭐를 먹고 가고 싶다. 그전에 이따가 가게 될 노선을 한번 파악하고 움직이자. 자카르타 코타에 가니 큰 역사가 나오고 기차인지 지상철인지 모를 기차 노선들이 쫙 있는데 나는 구글지도에 있는 표시로는 지하철을 타는 건 줄 알고 이리로 왔는데 알고 보니 버스였다.
"1번을 어디서 타야 해요?"
지하철 안내원 여자에게 물으니 1번은 여기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뭐가 또 잘못 왔나, 당황해서 다시 그럼 어디로 가야 해요? 하고 물으니 멀리 역사 밖을 가리키며 밖으로 나가 우회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까지도 지하철을 타는 줄 알았던 나는 뭐지? 싶어 어리둥절하자 버스라고 말해준다. "아,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1번 버스를 탈 수 있다고요?" 하고 확실히 곱씹어 다시 묻는다. 그랬더니 20대 초반 대학생처럼 보이는 그는 맞다고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지도를 다시 보았다. 아 이게 비슷비슷해 보이는 픽토그램이라 지하철이니 버스인지 모르겠다. 그래 이제 타는 데를 알았으니 코타투아 거리에 가보자.
역사 밖으로 나오려는데 계단에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비를 피하려고 북새통이다. 바람이 불지는 않아서 비바람이 치지는 않지만 얇은 비가 꽤 뚝뚝 떨어지다. 한 5분 정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서있는다. 횡단보도 건너에는 인형이며 풍선이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얄궂은 장난감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있다. 지난 학기 학교에 다닐 때 지하철을 타면 아가씨들 가방에는 하나같이 키링 인형이 달려있고, 아가씨들 뿐 아니라 2030 남성들 백팩에도 뭐 하나씩은 달려있던 것을 떠올렸다. 여행하면서 키치한 키링이 있으면 하나 살려고 했어서 잠깐 시선을 두고 봤는데 인형들이 너무 크고 무거워 보인다.
비가 잠잠해지자 자카르타에 와서 처음 본 것 같다고 생각한 몇 발자국 안 되는 횡단보도를 다른 사람들을 따라 걷는다. 비가 그래도 얼굴이 촉촉해질 정도로 내린다. 습하다.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그 도시이름을 딴 알파벳 앞에서 히잡을 쓴 어린 소녀들이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다. 즐거워 보인다. 코타투아 구시가지 파타힐라 광장으로 향하는 대로변은 모스크바까지는 아니지만 블라디보스톡의 아르바트 거리가 떠오른다. 적당히 넓고 오래된 아시아 양식은 아닌 낮은 건물들이 서있고 이것저것 파는 노점상들이 있는 것, 그리고 막상 별건 없는 황량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진다. 어린이들이 자기보다 훨씬 큰 형광색의 형형색색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 형광색 자전거와 모자를 함께 대여해 주는 것 같다. 핑크색 마녀모자를 쓰고 엄청나게 큰 바퀴의 형광색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여자 아이를 보며 귀여워한다.
파타힐라 광장에 오니 자카르타 와서 처음으로 나와 같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인다. 자카르타에는 랜드마크랄 게 정말 없어서 그나마 여기가 관광지 같은 관광지이다. 관광객뿐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온 히잡을 쓴 엄마들이 많다. 식민지 시대의 정부청사와 같은 건물들이 있는데 와, 이국적인 건물들을 보니 여행지에 온 기분이 확 든다. 이들에게는 아픈 역사일까. 이리저리 건물 사진을 찍다가 목이 말라서 뭐라도 먹을 겸 들어가야겠다. 약간은 비싸다고 하지만 파타힐라 광장에 유명한 Cafe Batavia라는 곳이 있고, 주변에 가성비 맛집이라는 곳들도 있는데 카페 바타비아의 외관이 매력적이어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입구에는 야자수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진초록색 천막에는 감각적인 폰트로 CAFE BATAVIA라고 쓰여있다. 폰트가 경쾌해 보인다.
와, 이곳 너무 분위기가 좋고 예쁘다. 감탄이 나왔다.
1층에 들어서니 20세기 초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삶과 예술을 논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장소이다.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커다란 공간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이고 저녁에는 밴드 연주가 있을까, 밴드 연주를 하는 바와 라운지도 있는데 공간이 너무 예쁘다. 저녁에 와도 너무 좋겠다. 1층은 흡연실이라 나는 2층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예약을 안 하고 갔지만 기다리지 않고 금방 자리가 났다. 2층으로 향하는 길에는 역사를 보여주는 듯한 갖가지 액자가 잔뜩 걸려있고, 우아한 샹들리에도 매달려있다. 밝은 마호가니색 나무 계단을 밟으며 올라가니 2층은 또 다른 분위기로 북적인다. 천장에 매달린 노란색 조명이 1층과는 다른 발랄한 우아함을 띄고, 밖으로 내다 보이는 파타힐라 광장, 높은 층고와 나무로 된 기다란 창문들이 펼쳐져 있어 시원하고 근사하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현지인, 백인들이 섞여 있는데 주로 백인 관광객들이 많아 보인다. 이들의 복장이 현대식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20세기 초 식민지 시대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나의 테이블로 테이블 근처에 있던 여자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준다. 이곳은 독특하게 손님의 이름을 불러 준다. 처음에 들어올 때부터 이름을 묻길래 예약을 안 했는데요? 했더니 그래도 이름을 말해달라고 한다. 그 이름은 테이블에 이름으로 저장이 되어 화면에 보이는지 위층에도 전달이 되어 나를 보고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보라색 스모키 화장을 진하게 하고 머리를 한올도 남김없이 깔끔하게 올림머리를 한 이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중간중간에 다가와서 맛이 어떤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묻곤 하는데 뭐랄까, 표정과 목소리가 과도한 친절인데 버거워 보인달까.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영어를 굉장히 잘해서 똑똑한 대학생들이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일까, 하고 생각했다.
메뉴판을 보니 어제 폭풍우가 부는 야시장에서 사 먹은 나시고랭보다 거의 10배 가격이다. 서울은 아무리 빈부격차가 심해도 같은 메뉴가 이렇게 가격차이가 심하지는 않은데, 아닌가 서울도 시장에서는 3천 원짜리 칼국수를 먹고 호텔에서는 3만 원짜리 칼국수를 먹고 그런가. 여기서 괜히 가성비 떨어지게 나시고랭 미고랭을 먹느니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자, 하고 다른 메뉴를 보았다. 아, 렌당! 저번에 친구가 먹어보라고 한 음식인데 이걸 먹어보자. 고기이니 영양가가 있겠지. 렌당과 음료는 음... 수박주스를 마셔볼까. 주문을 하려는데 렌당은 주로 밥이랑 먹는데 렌당에는 밥이 같이 나오지 않으니 밥을 추가로 시킬 것이라고 묻는다. 아, 네 그럼 밥도 같이 주세요. 이렇게 렌당, 밥, 수박주스 가격은 230k이고 서비스 차지는 10%, 세금 10%가 붙어서 278k가 나왔다. 2만 3천 원. 와, 인도네시아에서 기대치 않은 굉장히 비싼 밥이지만 그것보다도 서비스 차지와 세금이 이렇게 많이 붙는다니 놀라웠다. 친구 말이 와룽이 아닌 레스토랑에서 먹으면 이렇게 붙는다고 한다.
그래도 처음 먹어보는 렌당은 꽤 맛있었다. 소스가 한국인 입맛에 맞는 맛이긴 한데 내 입맛엔 약간 짜고 소고기가 찔기다. 그 장조림 부위 같은 부위이다. 빡세게 올린 머리의 여직원이 다가와 맛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맛있긴 한데 내 입맛엔 조금 짜다고 말했다. 그 직원은 프로페셔널하게 응대하려는 갖은 말투와 포즈를 취하지만 굉장히 당황한 것 같다. 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그냥 순수한 피드백이었는데.
창문 밖에는 비가 한바탕 시원하게 또 쏟아진다.
"자카르타 버스는 특이해! 손님들이 버스 중간까지 올라가서 타!"
다시 자카르타역으로 돌아와 버스 타는 길을 따라가니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굉장히 특이하다. 2층 버스 같이 높다란 버스의 허리춤 정도에 해당하는 높이에서 승객이 탄다. 2층버스를 1층에서 타서 계단을 오르는 게 아니라 밖에서 2층에서 타는 것 같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300원 정도를 내고 약 1시간 걸려 그랜드 인도네시아 쇼핑몰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Block M 방향으로 향하는 1번 버스를 탄다. 내리는 곳을 잊지 않기 위해 Bundaran, 하고 내리는 역 이름을 머릿속에 되뇐다. 전 정류장이 MH Thamrin이니까 그다음에 내리면 돼. 처음에 탔을 땐 사람이 거의 없어서 복도자리에 앉았는데, 점점 사람들이 타기 시작해서 안쪽 자리로 옮겼다. 안쪽 자리를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옆자리에 머리 길이가 어깨 조금 아래까지 오는 젊은 여자가 탔다. 옆자리 외국인인 나를 보고 그다지 친절하고 반가워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할머니들도 있고 학생들이 굉장히 많다. 소년 소녀들을 보니 밝고 명랑하고 경쾌한 에너지가 전해져서 좋다. 대중교통을 타면 현지인들을 관찰하는 게 재밌다.
이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어떤 표정을 하는지.
저 사람들은 어디를 가는 길일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일까? 시장에 가는 길일까?
반다란이라는 정류장에서 내려 그랜드 인도네시아몰로 향하는 길. 조금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온통 현대화된 도시 속이다. 호텔과 언론사, 고층 건물들로 둘러싸인 시청의 로타리와 같은 곳을 지나간다. 와, 나는 조금 전까지 판자촌과 같은 폐허 같은 곳에 있었는데 30분 거리에 이런 현대화된 도시라니. 그리고 이렇게 발달된 쇼핑몰이라니!
아, 또 비가 내리네. 그렇게 거세게 내리지는 않지만 젖을 정도는 내린다. 두 손을 펴서 머리와 이마를 가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몇몇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있기도 한데 대부분 그냥 맞으며 걸어간다. 그냥 시원하게 맞으며 걸어가자, 하고 마음먹고 손을 내렸다. 하늘을 쳐다보며 얼굴로 비를 맞았다.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자카르타 대로 한복판에 서 있다.
봐, 니가 10년 전부터 와보고 싶었는데 비행기도 잘 없고 비싸서 못 왔던 곳에 와 있잖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야!
그 머릿속에도 그려지지 않고 사진과 동영상에서도 잘 볼 수 없었던 인도네시아의 수도 한복판이라구!
언제 내가 이렇게 시간적 여유를 가지며 자카르타에 와볼까. 게다가 시간이 아까우면 이렇게 볼 거 없는 도시에 더더욱 올리가 없다.
비가 적당히 시원하게 내리고 얼굴과 머리와 옷이 촉촉해진다. 행복감을 느낀다. 오늘 이 시간에 만나리라 예상도 못했던 사람들과 같이 비를 맞으며 우연히 스쳐 지나가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는 머릿속에 전혀 그려볼 수 없었던 자카르타의 풍경과 거리와 촉감과 분위기다. 이 순간은 너무너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