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6)
내가 자카르타에 도착하기 전 날 친구가 출산을 했다. 나랑 메시지 할 때도 그런 말이 없었는데 다른 친구를 만나니 어제 출산을 해서 병실로 옮겼다고 했다. “그럼 산후 조리원 같은데 있나? 보러 갈 수 있어?”라고 물었더니, 다른 친구는 “그럼, 내일 같이 보러 가자, “고 말했고 우리는 쇼핑몰에서 점심을 먹고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 남 자카르타에 있는 병원이고 내 호텔에서는 차로도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다. 돌아올 때도 너무 미안하고 고맙게도 자꾸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구글맵으로 한 번에 가는 버스 노선을 찾아서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아, 꽃을 사가고 싶은데 병원 근처에 꽃집이 있을까?”라고 말했더니, “아유 됐어! 안 사도 돼! 그리고 꽃집도 없을 거야. “라고 내가 부담될까 봐 사지 말라고 했다.
아직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낮, 병원에 도착해서 차를 대고 우산을 쓰고 병원 입구까지 걸어갔다. 친구의 다섯 살짜리 아이가 뛰어다니길래 어허이, 미끄러져 조심해! 아기 봤어? 귀여워?라고 엘리베이터에서 물으니, She is my sister. she’s so cute!라고 말하는 거다. 아기를 귀여워하는 니가 더 귀엽다.
병실 근처에 도착하니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친구의 아이들이겠다. 와. 진짜 오랜만에 만나잖아? 설레는 마음으로 똑똑,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친구의 엄마로 보이는 은발의 아줌마가 항상 밝은 미소와 태도로 살아간 흔적으로 보이는 주름을 하고 유창한 영어로 나를 맞이한다. 반가워요! 나는 십여 년 전 네덜란드에서 시간을 같이 보낸 한국인 친구라고 소개를 했다. 어머니는 은퇴한 인도네시아 국립대 교수로 어머니가 네덜란드인(dutch)이어서 오똑한 코와 서양인스러운 외모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도 피부는 까맣지만 코가 오똑하고 예쁜데 1/4 혼혈인지는 얘기를 안 해줘서 몰랐다. 얼굴이 정말 작고 예쁜데 그때도 장진영을 닮았었다.
넓은 1인실에 넓은 침대에 누워 있는 친구는 건강한 미소로 허그하며 환대해 주었다. 와 이런 병실은 비싸겠다. 출산까지 해서 가격이 일반 사람들이 이용하는 비용의 10배 정도 되어 보였다. 남편과 광고 회사를 운영하며 PD인 친구의 인스타그램 속 작품들은 멋져 보였다. 카카오톡 인도네시아 광고도 맡았었다고 했다. 자체 스튜디오도 있어서 촬영을 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인으로서는 희귀한 기독교인이었던 친구는 결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무슬림이 되었는데, 내가 개종을 했다고?! 하고 놀라자, 좀 민망한 듯 그냥 전혀 신실하지는 않지만 공식적으로는 무슬림이 되기로 한 그런 뉘앙스로 보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그는 십여 년 전 식물원에서 같이 사진 찍고 여행하던 소녀로만 기억돼서 너무 이상하고 믿기지 않지만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다. 와 일하면서 애기 셋을 어떻게 케어해? 하고 물으니 베이비시터가 두 명 있다. 집에 상주하는 20대 초반의 베이비시터 비용은 한 명당 20만 원 정도라는 것 같다.
아이들의 이름을 물으니 인도네시아식이 아니라 영어식 이름을 지었다고 아이들은 영어로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인도네시아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유치원과 학교에서 영어만 써서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아빠를 둘러싸고 아빠와 노는데 아빠가 정말 자상하고 애들하고 잘 놀아주고 능력도 있는 것으로 보아 친구가 야무지게 남편을 잘 고른 것 같다. 캐주얼한 복장으로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주는 젊은 아빠!
“그럼 너희 부부도 아이들하고 영어로만 대화해?!” 하고 놀라서 물으니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여기 남자카르타 지역에선 많은 가정이 그렇게 해. 글로벌하게 키우려고 유치원부터 영어 수업으로 하고 아이들에게 영어로만 말하는 집이 많아. 영어를 하는 게 더 기회가 많잖아. ”라고 친구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가능한가? 친구가 영어가 유창하긴 하지만 모국어로서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감정을 나눌 정도의 영어는 아닌데 교감이 가능한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랑 같이 방문한 다른 친구는 아이를 인도네시아어로 키우고 있고 아이 때는 모국어를 먼저 배우는 것이 맞다는 나의 생각과 일치했다. 나라면 내 가족과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다.
친구 어머니도 엘리트층답게 영어를 아주 잘하신다. 내가 발리에 간다고 하니 자기도 작년에 일 년 동안 발리 살기를 했다며, 꾸미냑 지역에 묵으면서 그림 그리는 클래스를 몇 달 동안 다니며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와! 정말 예술적이고 예뻐요! 하고 사진도 찍었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혼자 꾸따 뚜아 지역에 간 얘기, 카페 바타비다에서 식사를 했는데 비싸지만 분위디가 예뻐서 좋았다고 얘기하면서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가 300년이 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래 나요? 인도네시아 역사 문헌들이 다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어서 네덜란드어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 세대는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안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네덜란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 식민지도 3년 반 정도 겪었는데 일본에 대한 반감은 크지 않다고 했다.
친구는 내가 엄청 말랐었는데 살이 쪘다(chubby)고 말했다. 어, 맞아 살 많이 쪘지!! 빼야 해~~~ 하고 말했다. 그렇게 느낄 것이 친구랑 알게 된 때는 170cm에 49-51kg 정도 나갈 때다. 기초대사량은 남자 수준이었다. 본투비 비쩍 마른 체형이라 고3 때까지 168cm에 43-44kg로 40키로 넘은 걸 다행으로 생각한, 전교에서 비쩍 마른 애 한 명을 골라라 하면 모두가 나를 지목할 정도로 마른 애의 대명사였다. 너무 뼈 밖에 없다, 말랐다는 소리를 듣는 게 싫어서 그나마 대학교 가서 찌웠고 30대가 넘어서는 폭발적으로 나잇살이 찌더니 거의 60kg 부근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할 정도가 되었다. 나의 경우엔 뼈 밖에 없던 체질은 결국 나이를 먹어가면서 해결되었다. 처음엔 살이 붙으면서 더 굴곡진 체형이 되니 여성스러워 보여서 좋았는데 요즘엔 거울을 보면 무지막지한 내 몸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옷이 안 맞아서 불편한 것도 있고.
친구는 저녁을 대접하고 싶지만 병실에서 병원 밥을 먹어야 해서 미안하다고 나와 먹으라고 다른 친구에게 돈을 보내주었다. 다른 무슬림 복장을 한 부부도 친구를 보러 왔다. 나는 내가 비와 땀에 젖어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해서 아기를 안아보지 않았는데, 또 아기를 혹시 떨어뜨리면 어떡해, 그들은 아기를 안아보았다. 그래도 안아보지 않은 게 다행이야. 난 아기를 안을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