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4), 난닝
친구는 내가 놀러 온다고 해서 5일 동안 휴가를 냈다. 공무원도 연차가 많지 않은데 나를 위해 5일이나 쓰다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일요일 밤에 도착한 나를 공항에서 차로 픽업해 준 친구 남편은 친구와 나를 친구 어머니 아파트 단지에 내려주었다. 낯선 느낌이 든다. 와 이런데 사는구나. 친구는 아파트 입구에서 번호를 치고 들어가는데 이 번호는 매일 바뀐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 올라가서 내린다. 친구 어머니 집 문 앞뿐 아니라 모든 집 문 앞은 한자로 빨갛게 행운을 비는 그런 것들로 장식되어 있다. 저번에 베이징에서 에어비앤비에서 잘 때도 있었던 그 장식들. 집으로 들어서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손님을 위한 여러 고무 슬리퍼 중 핑크색 슬리퍼를 신었다. 약간 작고 가벼운 슬리퍼다. 후끈후끈한 여름 공기가 환영해 준다. 거실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한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워 이마와 목, 등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본다. 불을 일부만 켜서 약간 음침하면서 중국의 현대판 도시 스릴러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다. 더워서 식은땀이 흐르고 비행으로, 환승으로 긴장이 아직 안 풀려 얼떨떨하고 낯설다. 대리석 같은 바닥, 어두운 목재 가구들, 빨간 배경에 하얀색 중국어 장식들이 벽 곳곳에 붙어 있고, 빨간색 잉어 모빌도 주렁주렁 달려있다. 누가 봐도 여기는 중국인의 가정집인 현실을 마주한다.
친구가 자기도 나랑 같이 자고 가겠다며 집에서 짐을 가져오겠다고 한다. 앗, 나 혼자 자도 되는데? 어머니랑 둘이 언어가 안 통해 불편할까 봐 엄마 집에서 10분 거리에 살아 짐을 금방 가져올 수 있다며 오늘 같이 자주겠다고 한다. 혼자가 더 편할 것도 같아서 남편이 외롭지 않겠대? 했지만 친구는 별 걱정을 하냐며 짐을 가지러 떠났다.
화장실에서 나온 친구 어머니는 나를 크게 환영해 주신다. 숏커트 머리에 자주색 브릿지를 넣은 머리에 밝은 성격을 가지셨다. 친구 어머니는 나보고 저번이랑 똑같네~ 잘 지냈어? 하고 말하는데 나는 중국인 친구가 어머니와 서울을 온 적이 있는데 이 친구였나, 다른 친구였나 헷갈린 데다 안면인식에 둔해서 알아보지 못했다. 약간 민망한 상황이 흘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한 부서의 30대 후반 여자 과장 두 명의 얼굴을 두 달 동안 구별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나는 키가 작고 단발머리에 사투리를 쓴다, 하고 거의 동일인으로 인식해서 이름도 계속 다르게 불러 서로가 당황스럽던.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잘 알아보는 편이 아니다. 외모에 강한 특징이 없으면 더 그렇다. 무례함이 온몸에 흐른다, 하는 문구가 생각나네..
친구 어머니 댁에서 자는 건 터키에서에 이어 두 번째. 친구가 집에 짐을 챙기러 간 사이 어머니와 중국어로 대화해야 하는데, 떠듬떠듬 눈치로 추측하고 간단한 단어를 사용하는 아주 극 생존 중국어다. 어플을 써서 대화를 하고 어머니가 위챗에 올린 여행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은퇴 후에 동영상 편집을 배워 여행 동영상을 직접 편집하시고, 벨리댄스 같은 것도 배워서 짤랑거리는 장식을 메고 무대에서 발표회 같은 걸 가지는 영상도 구경했다. 노옹춘~ 하고 시골에서 직접 기른 옥수수도 쪄주신다. 노옹춘,은 발음상 농촌으로 알아들어 나도 쓴다. 외국어 빨리 느는 건 copy & paste!
친구가 결혼 전에 쓰던 방에 이불을 깔고 잤다. 이 방은 다행히 에어컨이 나와 시원하게 틀고 있는데, 밤에는 심지어 너무 추웠다. 단점은 나무 바닥에 얇은 이불을 깔고 자니 허리가 너무 아프다. 이 방은 거의 창고처럼 사용되는 것 같다. 짙은 고동색 나무 찬장에는 중국 답게 각종 차로 가득하고, 나무로 만든 직사각형의 전통적인 향이 풍기는 전등은 얇아 보이지만 튼튼한 줄로 천장에 매달려 있다. 어머니는 손수 이불을 깔아 주셨고, 나의 연두색 캐리어를 들고 방 안에 들여놔주셨다. 어머니는 내일 시골집으로 가시니 편하게 지내다 가라고 하신다. 혹시 친구 어머니 댁에서 자게 될까 봐 마스크팩과 한국 화장품을 선물로 가져오길 잘했다.
지친 하루를 샤워로 마무리하고 비행의 여독을 씻어 내자, 하고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가 없어 충격을 받았다. 공항에서 오는 길도 대도시 풍경이어서 화장실 걱정을 하게 될지 몰랐는데, 도심 한복판의 평수 넓은 아파트인데 쭈그려 앉는 변기라니. 울고 싶었다. 물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친구 어머니가 수박을 까주냐고 물어보신다. 아, 괜찮아요. 밤에 화장실을 자주 갈까 봐, 내일 아침에 먹을게요! 하고 밝게, 영어로 말하고 아차차, 하며 어플을 이용해 여성 기계음으로 중국어로 대답하고.
중국에서 가장 녹색도시 중 하나인 난닝의 도심은 그린그린하다. 도심 곳곳에 높은 나무가 우거져 있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비슷하진 않지만 머리 위로 높은 나무들이 줄 서 있는 창원 가로수길이 문득 떠오른다. 도시 컨셉이 숲 속의 도시인가, 도시 속 숲 속인가,라고 하며 생태학적 관점에서도 지속가능한 도시 설계를 추구하는 도시라고 홍보된다. 친구의 스쿠터 뒤에 타 아침에 나와 한산한 도로를 달리는데 너무 시원하고 좋다. “와 진짜 녹색 도시구나. 여기 살고 싶다! 공기도 상쾌하고 예쁜 카페들도 많구. 일상이 숲 속을 걷는 것처럼 좋아.” 하고 말했더니, 친구가 고맙다고 했다.
친구가 어릴 때부터 살던 골목, 회사에 출근하는 골목, 학교 다닐 때 자주 걷던 길, 가끔 밥을 먹는 곳, 자주 사 먹는 카페를 갔다. 다른 나라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난닝이라는 곳에서 자라 지금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일생과 일상으로 들어와 호흡하고 있다. 친구랑 아이메시지를 할 때 지금 그의 일상이 어떤 장소 속에 있는지 이제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꽃을 파는 곳이 있어서 들렀다. 어머니께 선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친구가 그럴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하는데 사고 싶다고 했다. 어떻게 사야 할지 몰라 눈에 보이는 싱싱한 꽃들로 고르는데 주황색이 예뻐 보인다. 많이는 안 사고 몇 송이 골랐는데 한국에서 장미 한 송이 사는 값 정도로 가격이 너무 싸다. 길거리 꽃도 알리페이 결제를 하고 아침 먹는 식당도 친구가 큐알결제를 한다.
아침으로 먹은 국수도 2천 원 정도. 물가가 싸다. 중국에 있으면서 아침에 두유도 자주 사 먹고 친구가 사다 줘서 호빵 만두 같은 것, 여러 아침 식사 거리를 먹었다. 싸게 간단하게 사서 먹는데, 매번 친구가 샀다. 나는 나중에 돈을 한꺼번에 주겠다고 했는데, 친구는 거의 호텔 예약한 것 정도에 식비 약간만 받으려 했다. 이런저런 간식비에 여러 입장료에 대충 계산해도 훨씬 더 받아야 하는데, 친구는 초대하는 거고 자기네도 여행을 즐겁게 했으니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난 몸만 와서 따라다녔는데 미안하고 고마워서 현금을 넉넉히 인출해서 주는데, 질겁하며 이건 도리가 아니다, 하고 절대 받으려 하지 않아 내가 더 준비한 돈의 반만이라도 더 받기로 타협하고 돈을 돌려주었다.
나이가 나와 동갑인데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벌써 팀장인 친구는 공무원이다. 주말에 친구가 일하는 사무실을 구경했는데 너무 신기하고 좋다. 친구가 일하는 자리에 앉아서 타자 치는 척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중국 난닝에 사는 공무원이 된 것 같아! 친구가 일하는 사무실은 방에 책상이 두 개뿐이어서 심심하지 않냐, 여러 동료들하고 일하는 게 좋지 않냐고 했더니 장난스럽게 내가 부서의 Head니까 따로 방을 쓰는 거지! 하고 말했다. 나랑 또래니까 그 정도로 높은 줄 몰랐는데 친구는 다른 동기들보다도 승진을 빨리했고 부서원 중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벌써 관리자가 된 게 신기해서 어떻게 그렇게 승진을 했는지 등 이것저것 물어봤다. 벌써 관리자여서 어떻게 부서원을 관리하고 평가할지가 고민스러운 게 새삼 친구의 능력이 대단해 보이고 신기하다.
중국은 뭐 사회주의 단계이고 공산주의를 지향한다고 천명한 국가니까 노동자의 권리가 강할 것 같은데 친구의 월급은 나의 반도 안된다. 물론 물가가 싼 지역이기도 하지만(비싼 레스토랑이 아닌 곳에서 셋이 밥 먹어도 만원 정도 나옴) 석사까지 나오고 관리직 공무원인데 월급이 너무 적어 보인다. 처음 입사할 때 임금 체결한, 정해진 월급에서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노동조합은 뭘 하는 거야? 우리는 매년 임금협상을 해, 하고 말하니 노동조합이 있긴 하지만 직원 복지성으로 뭐 가끔 선물을 주고 쿠폰을 주고 그런 정도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