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11) 카사블랑카
나는 몽상가입니다. 내게 현실적인 삶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같은 이런 순간이 날이면 날마다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꿈속에서 그 순간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백야> 도스토예프스키
핸드폰 알람이 울려서 해제를 누르고 여기가 어디지, 하는 기분 좋은 몽롱함으로 깬다. 아까 타 마신 주황색 가루약 물이 온몸을 빠르게 타고 돌아 영혼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 체크인을 하고 돌아다니다 네시쯤 호텔로 다시 돌아와 한 시간 반정도 눈을 붙이고 나가야겠다, 하고 알람을 맞췄었다. 오늘 하루만 묵을 것이기에 아프다고 누워만 있기에 카사블랑카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고개를 돌려 왼쪽 편을 바라보니 새파랗지는 않고 새파란 색에 하얀색 물감을 몇 방울 떨어뜨린 파란색으로 잔뜩 칠해진 커다란 옷장이 보인다. 천장은 높고 침대 머리 위에는 옛날 카사블랑카 사진인지 그림인지가 걸려있는 오텔 상트랄이라는 호텔이다. 35유로에 예약했는데 기차역에서 걸어서 올 수 있고 주변을 걸어서 다니기에 좋은데 인테리어는 고풍스럽고 깨끗하고 층고가 높아서 유럽의 오래된 호텔에 온 것 같다.
몸을 틀어 햇빛이 들어오는 오른편을 바라보고서는 눈만 말똥말똥 뜨려고 하며 멍한 채 또 한참 누워있는다. 리스본에서 묵었던 에어비앤비 방에는 기다란 문을 열면 발코니가 나왔던 게 떠오른다. 나만의 뻥 뚫린 이 작은 공간에서 문을 열면 화악-하고 들어오는 공기를 마시며 주변을 내다보는 게 얼마나 재밌고 소중한 일인지. 발코니에 서서 다른 건물과 사람, 나무, 새 등을 관찰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예전에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 같이 여행하던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각자의 언어로 대화하느라 바쁘고, 나는 까만머리를 틀어올리고 줄담배를 피워대는 이탈리아인 친구 옆에서 어둑해져 노오란 불빛이 따뜻하게 감싸는 유럽풍 건물을 따분하게 내다 보았다. 그때도 에어비앤비 였는데. 유럽에서는 층고 높고 수동으로 문을 여닫아야하는 엘리베이트가 았는 유럽식 아파트 에어비앤비에서 묵으면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이 제대로 난다.
파란색을 칠한 기다란 나무 창문인지 문인지는 천장까지 이어져 있고, 방의 전체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회색, 파란색 커튼을 젖히고 문을 열면 호텔과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둔 건너편 1층 노천 식당과 카페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약간 차가운 그늘진 공기가 들어온다. 발코니에는 낡은 앤틱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역시나 철조망은 이 호텔을 아우르는 색깔인 하얀 물감 탄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바로 앞에는 아주 작은 공원이 있어서 초록초록한 나무 풍경과 새소리가 들리는데 아름다운 정원은 아니나 주변 풍경이 이곳이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게끔 새로운 분위기가 있다. 유럽 같지도 모로코 같지도 않고 오히려 좀 어설픈 유럽 느낌이 나는 달랏 같다.
일어나기 싫어서 누운 채로 근처에 있는 핸드크림을 만지작 거리며, 몽롱한 채로 12시쯤 호텔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약기운으로 밖에서 돌아다니고 지친 채 호텔로 돌아와 뻗었는지를 곱씹었다. 카사 포트역에 도착해 캐리어를 끌고 지도를 보며 호텔까지 오는 길은 이국적이었다. 커다란 야자수가 쭉 뻗은 길에 일정 간격으로 심어져 있고 모로코 문양의 대리석과 분수, 널찍널찍한 도로와 많은 차와 유동인구. 아 여기가 대도시 카사블랑카구나. 자꾸 조금이라도 정갈하고 깨끗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 바르셀로나 같다. 마라케시-페스-쉐프샤우엔-라바트를 거쳐서 오는 동안 도시마다 특색이 달랐는데, 여기는 관광지보다는 도시 노동자들의 분주한 일상을 볼 수 있는 대도시이다. 호텔 근처에 다다랐는데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호텔뿐 아니라 주변도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건물들이 산토리니 감성 색깔이었고, 주변에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내륙에 있는 도시와는 다른 공기와 분위기를 준다.
딱딱하고 기다란 나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호텔 로비는 더 마음에 들었다. 높은 층고와 크림색 벽, 앤틱한 고동색 가죽 소파와 바닥의 문양들, 그리고 곳곳에 걸려 있는 아랍 감성의 그림, 이국적인 디자인의 조명들. 엄청 길고 커다란 거울이 벽에 붙어 있길래 거울 셀카를 찍었다. 거울 자체가 변형된 검은색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예쁘다. 사진 속 나는 쉐프샤우엔에서 산 트위드 소재의 검정, 흰색의 반코트를 입고 여행 중에 산 여러 반지를 끼고 있다. 왼손등은 연한 주황색으로 군데군데 헤나 한 흔적이 남아있다. 감기 기운으로 표정은 기운이 없어 보인다. 바닥만 특별한 색깔과 문양으로 장식해도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다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의 여직원은 그을린듯한 멕시코인 같은 아름다운 외모로 전형적으로 미녀들이 가지는 약간 쉬크한 태도를 가졌지만 그래도 직원으로서 설명과 책임을 다했다.
짐을 풀고 나오면 벨쥑끄 광장이라는 거리가 나오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메디나 한복판이 나온다. 일주일 간 모로코 여행을 하면서 메디나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은 하루가 짧으므로 발길을 붙잡으며 말 거는 상인들을 뒤로하고 빠른 속도로 빠져나온다. 카사블랑카는 가볼 만한 곳이 많이 없었다. 메디나를 빠져나와 근처에 유엔광장이라는 곳이 나온다. 카사 포트와 메디나가 감싸는 건너편 안쪽의 한 지구에는 프랑스식 건물들이 가득한 골목에 많은 노천카페와 식당들이 나온다. 다음날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져서 카사블랑카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 아침을 먹을 겸 이곳을 산책하며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제미나이에게 카사블랑카에서 가볼 만한 hidden gem을 알려달라고 해서 habbous라는 곳에 가려고 한다. 구글에서는 여기쯤 어디서에서 버스를 타라고 하는데 정확히 모르겠다. 버스 기사에게 물어보니 다른 버스를 타라고 알려준다.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거예요?” 하고 5 디르함을 동전으로 준비하고 버스 앞에 줄을 서고 있는데, 쾌활한 남자 대학생 같은 청년이 말을 건다.
“아 하부스? 여기 가려고 하는데 이거 버스 타면 된다고 하네요.”
“버스요? 택시 안타고요?” 하고 그 청년 앞에 있는 아저씨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한다.
“네. 버스를 타고 가고 싶어서요.” 하고 내가 말했다.
“어디에서 왔어요? 혹시 한국인인가요? 모로코를 여행 중인 거예요?” 하고 아까 그 곱슬머리 청년이 물었다.
“오. 어떻게 알았어요. 한국에서 왔고 지난주부터 모로코를 여행하고 있어요. 제미나이가 하부스 지역을 가보라고 하는데, 여기 가볼 만한 데예요?”
“음. 저도 잘 모르는데. 처음 들어봐요.” 하고 내 지도를 유심히 보며 말해준다.
버스가 와서 요금을 내고 중간쯤 가서 앉는데 청년이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서 흔쾌히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갔는데, 이 청년은 카사블랑카 어느 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하는 대학생이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살이었다. 한 시간 걸려서 통학을 하고 있었고, 학교 끝나고 한 시간 걸려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탄 것이다. 모로코 사람들이 항상 먼저 말 걸고 친절하다고 말하니까, 모로코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볼지 시선을 신경 쓰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 청년도 내가 모로코 여행을 하면서 모로코 사람들을 어떻게 느꼈는지를 궁금해했고, 오기 전에 매체에서 접한 것과 다른 나의 긍정적인 감상과 인상을 말해주었더니 너무 좋아했다. 이 청년의 도움과 살가운 인상도 모로코 사람들에 대한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짧지만 몰입도 있고 즐거운 끊임없던 대화를 뒤로하고 구글이 내리라고 한 곳에 내렸다. 얕은 건물들이 이어져 있는 부촌 주택가 같은 동네로 인도에 사람이 거의 없다. 아니 여기 제대로 온 게 맞나, 뭐 하는 덴지 모르겠는데. 일단 quarter habbous, mahkama of pacha라고 한글로 시 법원이라고 쓰인 곳, petite place des habous라고 지도에 찍어 놓은 곳이 몰려 있길래 이쪽으로 향해보기로 한다. 다행히 사람이 거의 없어서 소매치기 우려 없이 다이소에서 사간 핸드폰 고리를 빼고 지도를 보고 걷고 있었다.
“Miss,” 하고 멀리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보았더니, 싱글벙글한 미소를 띤 체격이 약간 있는 젊은 여자가 나를 불렀다.
“네? 저요?” 하고 말했더니,
“네. 여기는 위험해요. 핸드폰을 조심하세요. 누가 채갈 수 있어요. 아, 근데 혹시 한국에서 왔나요?” 하고 조심하라며 당부하는 말을 하는 한편, 다가오는 나에게 더욱더 함박미소를 지었다.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한국인이에요. 안 그래도 한국인 유튜브에서 카사블랑카 인도에 서있는데 오토바이가 인도로 올라오더니 핸드폰을 슉, 하고 채서 도망간 걸 봐서 이런 걸 사 오긴 했어요. “ 하고 다이소에서 산 고리가 핸드폰에 달려있는 걸 보여주었다.
“Korean beauty! 한국의 미는 달라요.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이나 다른 아시아인하고 명확히 구분이 가죠!!! 여기 사람이 없더라도 늘 조심하세요. “ 하고 그녀가 말했다.
아, 이 분도 한국 영상을 많이 접한 모로코 사람인가 보다. 한국인에 대해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아름답다고 해주고 이렇게 말도 걸어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소녀는 근처의 관공서 같은 곳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데 잠깐 점심시간이라 나온 거라고 했다. 나도 여행을 하던 중이었어서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인스타를 공유하며 헤어졌다. 소녀는 내가 여행하는 동안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메시지를 보냈고, 내가 종종 올리는 여행 스토리에 늘 하트를 눌러준다. 그리고 내가 마라케시 메디나 골목 사진을 찍어서 올리니 유창한 영어로 어떤 화장품을 한번 사봐라, 오늘은 금요일이라 쿠스쿠스를 먹는 날이니 꼭 먹어봐라, 등등 디엠으로 음성 메모를 남겨 주었다. 말이 빠르고 목소리 톤은 유쾌하며 젊은 20대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고맙게도 올해 한국에 오게 될 일이 있다며 놀러 올 때 내가 못 사간 모로코 제품들을 한국에 올 때 사다 주겠다고 했다.
하부스 골목에 들어서니 다른 나라에서 보았던 유대인 지구 같은 느낌도 드는데 크림색과 황토색의 이국적인 건물들이 있고, 상점이 많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위치에 있는 푸르른 공원은 도심 속 작은 휴식처가 된다. 잠깐 멈춰서 사진도 찍어본다. 아치형의 커다란 문을 통과해 들어오면 역시나 기념품, 젤라바 같은 옷들, 미술품 등을 파는 골목이 나온다. 걷는 내내 사실 다른 메디나나 그런 곳과 다른 색다른 특성은 못 느껴서 굳이 여기까지 힘들게 버스 노선과 길을 찾아가지고 올 정도는 아니라고 느낀다. 제미나이는 하부스가 1910년대 프랑스 보호령 시절에 만들어진 뉴 메디나라고 부르는 곳이라면서 프랑스 + 모로코식 느낌이 섞인 곳으로 추천해 주었는데, 딱히 특별한 매력은 모르겠다. 그래도 도떼기시장 같은 호텔 근처의 복잡한 메디나 거리와 달리 관광객 없이 현지인들만 있는 상대적으로 한적한 곳이어서, 그래도 와서 보니까 또 산책할 만은 하다. 메디나는 주로 짝퉁 같은 옷이 많다. 걷다가 약간은 지치고 당 떨어지는 그런 에너지여서 여러 가지 옷을 입은 현지인들을 벤치에 앉아서 보니 신기하고 재밌다.
제미나이가 추천한 petit musee abdelwahab doukkali라는 작은 미술관 같은 곳이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어 걸어가 보기로 한다. 한낮의 기온은 17도까지 올라 햇빛이 뜨거워 체감은 20도 이상 무덥게 느껴져 입고 온 외투를 벗었다. 외투를 벗었는데도 뜨겁고 열이 나서 긴팔 옷을 걷었다. 큰 몇 차선 도로가 나오고, 구글맵이 알려준 곳으로 갔는데 도저히 어디가 미술관인지 모르겠다. 근처를 이리 돌아보고 저리 돌아보는데 그냥 은행만 나타나고. 휴. 포기하고 그냥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노선을 찾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한 15분 뒤에나 버스가 온다고 해서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다.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이 찡그려지고 자연스럽게 손으로 눈을 가린다. 정류장 의자에 가만히 앉아 눈를 감고 햇빛을 즐기기로 해본다. 열심히 돌아다녀 반들반들해진 피부가 조금 바삭하고 마를 수 있을까, 하고 얼굴을 햇빛으로 더 드리내밀듯 고개를 세워 들어본다.
그렇게 호텔 근처 메디나에서 내려서 호텔까지 거슬러 올라오는 길은 기분좋게 숨이 찬다. 다행히 그늘막 사이를 걷는 코스다. 우연히 만나 가판대에서 파는 착즙 오렌지 주스도 사 마신다. 오늘 오렌지 두 잔 째. 북새통인 상인들과 온갖 상품들, 도로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까만 아프리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소란스러운 이 분위기가 영상에서 접한 아프리카 감성이다. 그렇게 기진맥진하여 겨우 쓰러지듯 침대에 눕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