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대신 마라케시 일상 즐기기

모로코(9) 마라케시

by 모네


쾌락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가하거나 놀이공원이라도 찾아간 사람은 뜨거운 열기에 몸은 달아오르고,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뻑뻑해진 눈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온통 힘든 기억들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된다.

만족감을 얻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과도한 방법으로 여가를 즐기려는 태도 … 굳이 어느 오페라 공연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기쁨을 간과하지 말라

유행이나 관습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

거창한 쾌락이 아니라 사소한 즐거움

수많은 사소한 일들과 그로 인해 얻은 작은 기쁨들은 하나하나 꿰어 우리의 삶을 엮어 나간다.

가끔이라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는 생활을 해야 할 필요성

당신은 정말 행복한가

<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Ait ben haddou(사진 pinterest)


모로코 여행에 가져간 책은 헤르만헤세의 에세이인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오페라를 보러 가고 전시를 보러 가고 지루하게 신문과 책을 읽고 하는 현대인들의 강박증적인 취미를 꼬집는다. 해야할 것 같이 취미를 의무적으로 하지 말고 오히려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보라고.


여행에서도 비슷한 강박을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 왔으니 뽕을 뽑아야 한다고 꼭 가봐야 할 관광지를 다 가려고 하면 너무 지친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들어 투어를 이용해야 하는데 가볼만한 곳을 다 가려한다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발하는 투어를 거의 매일 예약해서 다녀야 한다.


마라케시에 가게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위 사진에 나오는 아이트 벤 하두라는, 왕좌의 게임 촬영도 했다는 곳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지도로 봐보니 혼자는 가기 어려워서 당일치기 투어를 이용해야 한다. 근데 차로 이동만 왕복 7시간 정도 해야 하는 피곤한 코스이다. 마라케시, 하면 유일하게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6-7개 도시를 여행하고 마라케시에 도착하니 심신이 너무 지쳤다. 그러던 중 오늘 아틀라스산맥 투어를 다녀오면서 왠지 풍경이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 오가는 시간 동안 피곤함에 비해 만족도가 크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아이트 벤 하두에 다녀온 스페인 커플 이야기를 들으니 엄청나게 특별하지는 않은 것 같아(듣고 싶은 대로 들었을 수도)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그러니 돌아가기까지 이틀이 통으로 빈다. 처음엔 아쉽기도 했지만 포기하니 여유있는 시간이 생겨 마음도 편하다.


아틀라스 산맥 투어를 마치고 호텔이 있는 마라케시 메디나로 돌아와 해 가지는 풍경을 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현지인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내가 한국인인걸 알아보고 한국인과 대화해 보고 싶어서 먼저 말을 건 것이었다. 소녀는 중산층의 현지인 대학생이었고, 한국 드라마 등 문화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우리는 친구가 되어 같이 산책하고 대학생들이 자주 사 먹는다는 디저트도 사 먹었다. 안내도 해주고 친절히 대해준 게 고마워서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소녀가 사주어서 내가 음료를 샀다.



버스타고 다녀온 마조렐 정원


원래 아이트 벤 하두를 가려고 한 날에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 마지막 날 가려고 했던 입생로랑 정원에 갔다가 소녀가 왓츠앱으로 알려준 가볼 만한 곳 중 구엘즈 거리를 걸었다. 한적한 주택가 같은 곳인데 마라케시 답게 붉은 살구색 건물들이 있다. 낙엽진 바르셀로나의 겨울 풍경같기도 하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메디나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한적한 거리를 걷는다. 처음으로 관광지가 아닌 주택가 같은 곳 카페에 들어왔다. 유럽에서 온 백팩을 멘 여행자들도, 다른 아프리카 도시에서 온 듯 새까만 흑인들도 옆자리에 앉아 브런치를 먹고 있다. 눈떠서 씻고 나와 바라보는 일상의 풍경이 이렇다니. 나는 핫쵸코를 한잔 시켰다. 정말 다양한 케잌과 빵들이 전시되어 있는 게 하나 먹어보고 싶은데 조금 전에 밥을 먹어 배부르다.


옷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은 분수를 중심으로 연두색 잔디가 푸르른 광장이 있고, 22도의 따뜻한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벤치와 분수 근처에 자유롭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평화로운 풍경이다.


2시경에는 소녀와 만나서 시크릿 가든을 가기로 해서 얼른 숙소에 가서 쇼핑 짐을 두고 재정비 후 만났다. 소녀는 예의가 바르고 메디나를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재밌고 유쾌하다.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쓰는데 우아해 보인다. 소녀가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 현지인 가격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도를 안 보고 소녀만 따라가면 되니까 편하고 좋다. 그런데 소녀가 시크릿 가든에 아는 친구가 오늘 일을 안 한다고 해서 그냥 나왔다. 뭐, 시크릿 가든 꼭 안 가도 돼! 하고 메디나를 산책하다가,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냐고 묻길래, 지도를 펴고는 음, 바히아 궁전? 여기 가볼까? 했더니 자기가 아는 길이라고 흔쾌히 같이 가줬다.


바히아 궁전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구경도 했다. 전시 같은 것도 열려서 구경을 했다. 소녀의 입장료는 현지인 가격이라 훨씬 싸다. 같이 와준 게 고마워서 내가 내겠다고 하니 계속 거절하더니, 그러면 자기가 아이스크림이라도 나중에 사겠다고 했다. 바닥에 깔린 형형색색의 타일 모양과 부드러운 곡선 장식, 천장을 바라보면서 화려한 중동스타일 문양과 조명을 구경한다. 얼핏 단청색 비슷한 단색으로 이루어진 천장은 동양적인 느낌도 든다. 정원의 나무와 햇살, 자스민 공주가 나올 것 같은 아라비안 나이트 문양처럼 둥글게 파져 있는 벽의 입구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바히아 궁전


그렇게 구경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나이지리아인 남자, 여자 흑인 둘이 다가와 혹시 한국인 맞냐고, 자기들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 많이 봐서 너무 좋아한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말을 걸었다. 특히 여자는 흥이 엄청 많은 극 E로 순식간에 내 핸드폰을 가져가 남자에게 주고는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내 핸드폰이 최신폰이라 더 잘 나올 것 같다고 그걸로 찍자는 것이었고, 또 순식간에 에어드랍으로 자기 폰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소녀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해서 얘기를 길게 못하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어 자주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나이지리아에서는 서울대 같은 대학을 나오고 그 나라에서는 엘리트였고, 영어가 모국어라 영어도 잘했다. 둘 다 석사과정 중이라 여러 대화가 잘 통한다. 둘 다 미국에서 석사를 하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장학금 전부를 받는 조건으로 여러 대학에 합격했는데 비자가 거부돼서 못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박사는 돈 걱정 없이 유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너는 여권파워도 있고 동맹국이니 비자도 받기 쉬울 것이라고 자기들처럼 미국을 지원해 보라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고 정보도 준다. 한국도 놀러 오고 싶다고, 특히 둘 다 여행을 통해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걸 좋아하는 공통점도 있어서 내가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 그리고 여러 사진들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며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을 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가보고 싶었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관광지 방문으로 멀리 나갔다면 시간에 쫓겨 관찰하기 힘들었던 길거리, 카페, 버스정류장의 현지인들을 관찰하고, 대화도 나눠보고, 또 다른 아프리카 나라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된 것이 소중하다.


그래도 의도치 않았지만 내가 갔던 곳들이 지금 찾아보니 모로코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9곳 중 6곳이나 포함되어 있고 모두 너무 좋았다. 각각의 특색이 다 다르고 왜 지정된 지 알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못 가본 곳도 가봐야지.


<가본 곳>

페스 구시가지(메디나)

마라케시 구시가지

라바트: 근대 수도와 역사도시(12세기 고대 유적과 20세기 프랑스 통치기 때 현대 도시 공존)

에사우이라: 항구도시로 유럽 + 북아프리카 스타일의 요새 도시

메크네스: 17세기 수도 역사 도시

볼루빌리스 고고유적: 로마시대 유적지

<가볼 곳>

아이트 벤 하두: 흙벽돌 요새마을, 글래디에이터 왕좌의게임 촬영지

테투안 구시가지: 안달루시아 스타일

엘 자디다: 포르투갈이 세운 요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