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7) 쉐프샤우엔
어제 저녁 6시쯤 쉐프샤우엔에 도착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더니 오는 동안 느린 속도로 지나온 풍경에는 비가 오다 말다 무지개가 뜨기도 했다. 캐리어를 끌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예약한 숙소까지 가려면 택시 밖에 없는데 다행히 나오자마자 잡아 타기가 쉽다. 비에 땅이 젖어 페스에서 산 기다란 니트 가운이 땅에 살짝살짝 끌렸다. 왼손에 연두색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오른손엔 핸드폰을 쥔 채 약간씩 내리는 비를 가려본다. 터미널에서 내리는 고객을 싣기 위해 준비 중엔 택시 한 대가 빵빵-해서 호텔 주소를 보여주니 안에 들어갈 순 없고 여기 길에서 세워줘야 한다고 했다. 알겠다고 탔는데 젊은 기사 아저씨는 20 디르함 정도로 저렴하게 느껴지는 값을 받아 호구가 되지 않은 기분이 좋았다.
쉐프샤우엔은 기차가 없어서 탕헤르나 라바트, 나처럼 페스에서 장시간 버스를 타고 와야 해서 그 아름다운 파란 거리 사진에도 짧게 오는 사람은 스킵하는 곳인 것 같다. 페스에서 당일치기로 프라이빗 밴을 타고 쉐프샤우엔을 다녀오는 것도 괜찮았겠지만 예쁜 곳에서 사진도 찍고 밥도 먹고 여유도 즐기고 싶어서 시간도 많겠다 2박을 하기로 했다. 날씨가 좋았으면 좋았을 텐데 머무는 기간 내내 비 예보가 있어서 아쉬웠다. 그런데 비보다는 추위가 더 큰 고난이었다. 숙소에 난방이 안되니까 으슬으슬 떨면서 자다 감기에 걸렸다. 여행에서 감기에 걸리면 에너지도 의욕도 떨어지는데 시간을 날리는 게 아깝기도 하고. 방에 두툼한 담요가 있었지만 0도에 가깝게 떨어진 밤 기온에다 하필 모로코 여행에서 제일 싼 호텔이어서 난방이 안된다.
택시에서 내려서 다다른 예쁜 파란색 지구의 입구는 유럽의 돌바닥처럼 되어있어 중세시대 감성이 느껴진다. 왜인지 에스토니아의 올드타운도 떠올랐다. 캐리어를 끌기 약간 불편했지만 대로변에서 호텔이 가깝고 주변에 맛집과 기념품 거리도 즐비해서 위치가 좋았다. 저녁이라 상점들이 문을 곧 닫을까 싶었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옷, 기념품, 여러 공산품을 파는 상점 등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구글지도가 알려준 골목길로 들어서니 흰색을 몇 방울 탄 짙은 파란색 골목이 펼쳐졌다. 얼른 체크인을 하고 나와야 할 텐데 예뻐서 사진을 찍느라 한 걸음 한 걸음 진도가 안 나갔다. 의외로 오래 걸린 체크인을 끝내고 방에 짐을 간단하게 풀고 비가 오니 스카프를 머리에 잘 쓰고서 호텔 밖을 나섰다. 메디나 중심가를 향해 가는 동안 여기저기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구경하자, 하고 마음먹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기도 오렌지 나무들이 있네. 어둠이 내린 밤거리에 조명이 켜졌고, 오렌지가 탐스럽게 많이 열린 오렌지 나무들을 보며 사진을 찍는다. 비가 오기 시작해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고, 남자들은 발목 근처까지 오는 기다란 후드 원피스 같은 옷을 단체로 입었는데 트위드 소재 같은 재질인데 되게 예쁘고 멋스럽다. 검은색도 쉬크하고 카키색, 하늘색, 핑크색 등 대체로 비슷한데 조금씩 달랐다. 나도 이 옷을 사서 입어보려고 여러 상점을 돌면서 입어 봤는데 탄력이 없는 소재인데 지퍼가 없어서 머리 위로 길게 뒤집어써야 해서 입고 벗기에 나쁘다. 그런데 한 가지 굉장히 귀여운 것이 뾰족한 모자이다. 광장에서 모로코가 출전하는 아시안컵을 큰 화면에 틀어줘서 사람들이 넋 놓고 보는데 그 뒷모습이 엄청 귀엽다. 다들 요정처럼 뾰족한 후드 모자를 썼는데, 비가 오니까 큰 모자를 한 뼘 접어 앞모습을 보면 다 똑같다. 주로 중장년층이 많이 입는다고는 하지만 할아버지든 젊은 사람이든.
이걸 사려고 다음날에도 여러 상점을 보면서 여자 것도 있냐고 하면 남자 거 같은데 남녀 공용이라며 아저씨들이 계속 입어보라고 한다. 그중 여자 옷이 따로 있는 곳에 갔는데, 예쁜 색감과 디자인이 많았다. 아저씨가 처음엔 450을 부르더니 한국에서 입기에 유용성이 떨어지고 입고 벗기에 나빠서 계속 고민하는 내가 비싸서 그런 줄 알고 150까지 깎아줬다. 그런데도 안 사고 가려고 하자 진짜 멀리서 소리치며 100까지 할인을 해주려 했다. 외투인데 100은 너무 싸다고 생각했지만 더 둘러보기로 했다. 상점마다 비슷한데 다르게 각기 다른 예쁨으로 입어보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다.
다음날 마음에 드는 상점이 있었는데 떡볶이 단추와 지퍼가 있는 반코트 형태였고, 검정, 흰색이 섞인 트위드 소재의(다른 명칭을 모르겠다) 요정 모자 후드가 달린 옷이었다. 젊은 아저씨가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보았고 영어도 굉장히 잘해서 대화도 많이 하고 옷도 마음에 들어서 사려고 했는데 250에서 더 안 깎아 주려고 했다. 내가 다른 데서는 비슷한 옷을 100까지 부른 아저씨가 있었다고 하니, 솔직히 말하는 건데 진짜 자기도 100 이하로 옷을 떼오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깎아줄 수 없다고 했다. 아직 오늘 온종일 시간이 있는 나는 그럼 더 둘러보겠다고 했고, 아저씨는 잡지 않았다. 이렇게 여유롭게 비교하면서 쇼핑을 할 수 있다니, 당일치기가 아니어서 2박하기로 하길 잘했다. 결국 오늘 여행의 말미에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안 가본 남쪽으로 걸어내려 가 보는데 좀 외져서 관광객이 나밖에 없는 거리에 이끌려 들어간 상점에서 150에 샀다.
자주색 반코트 떡볶이 단추 형태가 에스닉하면서도 한국에서 소화할 만한 힙한 구석이 있어서 입어봤는데 사이즈가 좀 작았다. 아저씨는 입으면 늘어나니까 괜찮겠다 하면서도 다른 걸 계속 가져오면서 입어보라고 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경쾌한 모로코 아저씨는 안에 들어오면 옷이 더 많다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했고, 안에 들어가 보니 4층 규모의 커다란 옷가게에 진짜 다양한 부인 옷들이 걸려있었다. 젤라바부터 약간 현대적인 원피스, 실크 느낌의 얇은 원피스, 그런데 대부분 좀 무슬림 옷 같아 보이는데 아무튼 색감과 소재와 디자인이 굉장히 다양하고 화려했다. 캐리어가 이미 꽉 차서 더 넣을 공간이 없었고, 지난 여행 동안 산 옷들도 있어서 많이 아쉽다. 더 사고 싶은 옷도 많고 아저씨도 진짜 좋은 가격으로 옷을 줬는데(여행에서 만난 현지인들이 이 가격이면 다들 진짜 잘 산 것이라 말함) 한 개만 사고 나온 게 아쉽다. 더 팔아주고 싶은데 다음에 가기도 어려운 곳이고 우산 쓰고 땅 보며 걷다가 만난 곳이라 가더라도 어딘지 찾아가기도 어렵다. 아저씨도 200 정도에 팔고 싶어 했는데 내가 학생이다, 다른 데서 100에도 팔려는 아저씨가 있었다, 여행 말미라 현금이 별로 없다, 하는 여러 전략을 통해 150에 서로 좋은 금액에서 기분 좋게 타협을 했다.
쉐프샤우엔 기념품으로 엽서, 마그넷을 의무적으로 산 뒤 페스에서 사려고 했던 모로코풍 가죽가방도 구경하고 램 타진을 먹고 싶었던 터라 길 가다 만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페스보다 반 값 정도의 물가라 램 타진이 다른 메뉴에 비해 약간 비쌌는데도 비싸게 느껴지지 않았다. 생 망고 주스도 하나 시킨다. 맛집을 찾아보고 들어온 것이 아니어서 무난한 맛이지 막 맛있고 그렇진 않다. 다만 양고기와 감자, 양파, 당근 등 채소가 같이 있어서 여행에서 부족한 채소를 보충한다. 야외 테이블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길래 나도 테이블 하나를 잡아 밖을 보면서 식사를 시작한다.
역시나 조금 먹기 시작하니 모로코 길고양이들이 발 밑에 몰려들어 슈렉 고양이 눈을 하고 쳐다본다. 으악, 너무 귀여워. 근데 나 고양이 무서워하는데. 얘들이 무릎에 뛰어 올라올 듯이 적극적으로 터치를 하는 바람에 직원을 불러 무섭다고 하니 크슥크슥, 하면서 고양이를 쫓는다. 중반 정도 먹어가고 배가 찰 무렵 고기도 식어가고 식사에 흥미를 잃어가서 고양이들에게 좀 나눠줄까 싶었다. 식은 것도 맛있게 먹으려나. 멀리 손님을 기다리며 기둥을 붙잡고 무료하게 서있는 남자 직원에게 고기를 줘도 되냐 물으니 흔쾌히 줘도 된다고 자기들도 남은 걸 모아서 준다고 했다. 그래서 근처에 다가온 회색 고양이에게 조금 떼서 던져주었다. 그러자 하얀색 배에 입가에 우유자국 같은 회색 털이 있는 고양이도 다가오더니 입맛을 다시며 팔로 고기를 재촉한다.
다음날 아침 관광객이 없을 때 파란색 골목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사람이 없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팁을 보고 아침 9시쯤 길을 나선다. 대로변 근처에 있는 넓은 골목에는 아저씨 아줌마 할 것 없이 나와서 아침 장을 보고 있다. 약간 흐리고 기온이 낮은 편이라 다들 또 요정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특히 배불뚝이 인자한 수염 덕수룩한 할아버지들이 요정모자 원피스를 발목까지 입고 걸어 다니는 일상이 귀엽다. 연한 파란색에 흰색을 많이 섞은 색에 바닥에는 쨍한 파란색과 흰색, 회색이 섞인 파란색이 골고루 섞인 파란색 골목들을 지나간다. 샛파란색은 그 마라케쉬에 있는 입생로랑 정원의 샛파랑이 떠오르는 쨍하고 기분 좋은 파랑이다.
구글 지도에 전망 포인트가 있길래 그리로 향해간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중간중간 사람이 아예 없어서 멈춰 서서 카메라를 세워두고 타이머를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비가 와서 흐린 날씨여서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위로 올라서자 포카리 스웨트 마을 전체가 보이고 구름이 우아하고 풍성하게 내려앉은 뷰가 정말 아름답다. 꼭대기 뷰 포인트에 가니 검은색 옷과 스카프를 둘러쓴 마을 할머니 둘이 보러 왔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신다. 와 정말 아름답다. 마을 전체를 조망하나. 파란색 골목들은 옅어지고, 내가 있던 마을은 한 구역일 뿐 산구릉 저 멀리까지 파란색, 흰색 집들이 굽이굽이 이어져있다. 너무 아름답고 신기하게 압도되어서 뒷걸음질 치면서 점점 언덕 위로 올라간다. 사진과 동영상을 잔뜩 찍지만 역시나 사진에 잘 안 담긴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고양이 떼들이 비를 피해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와 터키보다 모로코가 고양이가 더 많은 것 같아. 고양이를 비롯한 동물을 무서워하는 편이지만 페스에서 새끼고양이가 내쪽으로 다가와 다리에 등을 비비던 것을 시작으로 고양이가 너무 귀엽고, 심지어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동료가 터키에 갈 때 길고양이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는데 손바닥만 한 작고 소중한 고양이가 너무 귀엽다.
골목골목 조금씩 다른 파란색이 변주된 골목과 제각기 다른 옷, 카펫, 액세서리, 엽서, 가방, 신발 골목을 구경하며 탐험하는 게 너무 재밌다. 4시간만 본다면 너무 후루룩 아쉬운 시간이어서 2박은 한 것이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1박이어도 전날 저녁에 도착해서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기에 너무 촉박하다. 창구 아저씨가 라바트행 버스는 항상 이른 아침 한 대밖에 없다고 해서 도착한 날 미리 알아보고 예매하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고 싶은 모로코풍의 가방이 있는데 파란색과 주황색 중에 고민하다 주황색을 샀는데, 지금 보니 파란색도 예쁘다. 청바지나 검은색 바지에 메고 출근하기에도 독특해 보이는데. 가방도 아저씨들에 250-300 정도에 부르는데 페스의 한 골목에서 비슷한 가방을 젊은 청년이 150에 주겠다는 걸 더 둘러본다고 안 샀고 그게 너무 예뻤어서 후회가 되어서 더 비싸게 주고 사고 싶지는 않았다. 아저씨에게도 150 이상으로는 못 살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니 처음에 180까지 내려오다가 결국 150에 주기로 했다. 왜냐면 가방 안에 주머니가 따로 없고 가방 줄도 완성도가 높지 않다. 길이 긴 걸 그냥 그 자리에서 펀치 뚫어서 잘라주는, 그냥 기념품적인 가방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로코에서 산 기분 가득하고 made in chefchaouen 이어서 모로코 쉐프샤우엔에서 산 가방이야! 하고 스스로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히 소중하다. 아저씨가 내가 크로스를 매보고 잘라달라는 길이에 맞게 자르고 옆집 아저씨를 불러 펀치 구멍도 뚫어줘서 좋았다.
그렇게 걷다가 한갓진 공원이 나타나고 황토색 성벽과 오렌지 나무, 놀이터, 벤치가 있는데 멀리 무슬림 옷을 입은 아줌마 셋이 도시락 같은 걸 싸와서 벤치에서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표정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나도 벤치 한 곳에 앉아 걷느라 약간 피로해진 종아리를 살짝 주물러주고 풍경을 바라본다. 멈추어 서 바라본 풍경은 걸출한 산과 걷히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뭉게뭉게 퍼져있는 구름, 기다랗고 이국적인 나무들, 야자수가 연한 하늘색, 쨍한 하늘색, 흰색 섞인 연한 하늘색의 한가한 상점거리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마침 한낮이라 해가 뜨기 시작해 그나마 쨍한 낮의 공원에서 혼자 사진도 찍고 휴식을 취한다.
이제 내일 다시 라바트행 버스에서 먹을 빵도 사고. 환전도 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