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12) 페스
“자기 오늘은 뭐 할 거야?”
“오늘은 반지랑 향수 사는 거? 말고는 그냥 동네 산책해 보려구. 어제 여기 숙소 직원이 알려주기로 구리랑 브론즈로 유명해서 반지도 저렴하고 예쁜 걸 살 수 있나 봐. 실버로 사려고 돌아다녀 봤는데 치앙마이보다 안 예쁘고 가격도 비싸서 구리 반지 사보려구. 근데 거기 새벽 4시 아니야? 왜 이리 빨리 일어났어.” 하고 내가 답장을 보냈다.
“여자친구 걱정돼서 챙겨주려고. 어제 우리가 좀 말다툼한 게 걸려서. 미안해 어제.” 하고 그에게 답장이 왔다. 그는 아직 내가 허락? 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이미 여자친구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남자친구로 생각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어제 처음 여기 페스에 왔는데 모로코 남자들은 여자를 손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다 챙겨주더라 너무 스윗하더라, 다정한 눈빛과 미소로 쳐다보고 말도 따뜻하게 걸어주고 다 도와준다고 했더니 삐졌다. 나는 삐진 게 귀여워서 안 받아주고 계속 도발했더니 자기처럼 너와 미래를 그리고 준비하고 결혼할 진정한 남자가 누구인지를 잘 판단하라고 했다.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으면 만나라며 그만 얘기하고 싶다고 잘 자라고. 그런데 귀엽게도 답장을 하면 계속 받아주는.
“아니야. 나도 미성숙한 너를 보는 게 재밌어서 즐겼어. 내가 자꾸 도발해서 미안해. 웃겨. 세상 어른 같아 보이는 테토남 알파메일도 삐지는구나? “ 하고 말했다. 평소엔 연락 잘 안 되더니 자기가 쟁취하고 싶은 여자 주위에 경쟁자들이 어른 거리는 거 같으니까 칼답장하고 계속 안부 물어주는 게 얄밉기도 했다.
“반지 사면 꼭 ring finger에 끼도록 해. 이미 임자가 있는 여잔 줄 알도록.”
“아니 나 ring finger엔 샤넬 반지를 낄 거야.”
“물론. 디자인만 골라서 알려줘. “
어제 7시간 걸려서 마라케쉬에서 페스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계속 앉아서 오느라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양치만 하고 옷만 간단히 입고 나와 조식을 먹는데 맞은편 거울에 비친 눈이 부어있다. 그래도 잠을 충분히 자고 탄수화물 가득한 조식을 먹으니 힘이 나는 것 같다. 아침을 만들어서 갖다 주는 턱수염이 까맣고 장발의 예수머리를 한 모로코 남자는 잘 잤냐고 다정하게 인사해 준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작아서 부러운 비율이다. 혼자 온 손님은 나 밖에 없어서 어느 정도 손님들 식사를 다 나르고서는 주변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국 드라마 뭐를 봤다는데 내가 그의 액센트 있는 영어 발음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구글로 검색해서 보여준다. 지창욱이라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인데 그 배우가 자기는 너무 멋있고 드라마도 너무 재밌었다고 한다. 다른 직원도 다가와서 셋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 대학 신입생인 귀여운 18세 소년이다. 영어도 잘하고 독일어도 잘한다. 나와의 대화를 흥미로워하고 나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는 숙소 밖까지 얼마간 배웅해 주면서 몇 살이냐고 물었다. 자기 유럽에 취업할 거라며 비전도 있어 보이고 열심히 사는 청년인데, 나이 또래가 비슷했다면 연락하면서 지내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좋은 친구가 됐었을 수도 있겠다. 모로코 사람들은 외국어에 능통하다. 아랍어, 프랑스어는 모국어처럼 하고 영어도 되게 잘하고 투어 운전기사와 가이드들은 스페인어도 잘한다. 스페인 여행자들이 많긴 많다.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왔다. 페스의 구도심이라고 해야 하나 메디나는 미로처럼 복잡하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근처의 황토색으로 된 거리처럼 목을 하늘로 꼿꼿이 들어 보아도 그 끝이 안 보일 만큼 높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 싸인 좁은 골목들의 연속이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한 손에는 지도를 켜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는다. 개나리색, 바랜 레몬색, 황토색 벽이 오래되어 낡은 벽들과 캐리어 덜덜거리게 하는 회색 돌길을 걷다 보면 방긋 웃어주는 현지인 아이들도 만나고 꼬질꼬질한 고양이들도, 무슬림 복장을 한 퉁퉁한 여인들도 마주친다. 이런 길이 계속 반복되는 걸까, 하고 걷다가 그래도 차가 다니는 도로로 이어지는 길로 나왔는데 나타난 햇빛과 사람 사는 소리에 너무 숨통 트인다. Bank of Africa라고 파란 배경에 쓰여있는 은행이 나타나고, 와 내가 진짜 아프리카에 와있구나, 하고 영상에서 접한 아프리카 풍경 같은 길과 현지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사를 내지른다. 저 멀리 온갖 낡은 색의 갖가지 변주된 노란 황토색 건물들이 압도한다.
지도에 Place seffarine이라는 곳을 찍고 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 본다. 구리를 만들고 제품을 파는 곳들이 모여 있다고 숙소 직원이 알려준 곳이다. 아침이라 약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방향으로 가는 길에도 늘 사람들이 커다란 미소로 말을 건다. 일단 where are you from으로 시작하는 동양인을 만난 게 진짜 호기심 있고 신기해서 말 거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돈을 벌려는 목적이다. 뭐 자기가 길 안내를 해주겠다거나 자기 상점에 들어오라고 말을 건다. 어떤 아저씨는 이미 자기가 가이드를 하고 있는데도 “테너리?” 하고 물으면서 테너리(가죽염색공장) 갈 거면 자기가 안내해 주겠다고 자기 손님이 있는데도 영업을 한다.
“아, 아니요. 테너리에 안 갈 거예요.” 하고 말했다. 페스에 오는 관광객의 99%가 테너리를 갈 것 같은데, 그러니까 더욱 테너리 길안내를 하며 푼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성행한다.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하도 테너리를 보았더니 크게 감흥이 안 생겼다. 일단 구리 반지를 사러 가보자. 가는 길에 만난 어떤 사람은 오늘은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래도 근처에 가봤는데 구리로 된 악세사리며 컵이며 장식품들을 파는 상점들 몇 군데가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관광객들이 잔뜩 들어가는 골목이 있어서 따라 들어갔더니 섬유를 가공해서 스카프와 옷을 만들어 파는 골목이 나왔다. 골목에 단단한 빨랫줄 같은 데다가 스카프를 보기 좋게 전시해 놓고 판매한다. 아저씨들마다 계속 자기 스카프를 보러 가라고 영업을 했다. 그런데 지금 좀 쌀쌀해 가지구 스카프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이 집 저 집 보다가 한 코너에서 보라색의 신비로운 색감과 문양이 예뻐서 계속 쳐다보고 만져보았다. 이 골목에서 시세를 파악해 보니 처음에 250-300 디르함을 부르고 조금씩 깎아주는 것 같았다. 무슨 제품을 파는 곳이든 250부터 부르는 게 국룰인 듯했다. 보라색이 예뻐서 보는데 아저씨는 야, 이거 사겠구나 나를 적극적으로 붙들고 이것도 걸쳐봐라 저것도 걸쳐봐라 목에 둘러준다. 내가 마음에 들어 한 보라색은 뒤집으면 핑크도 나온다고 하면서 실크다, 하고 자기가 180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이게 실크라고? 실크라면 너무 싼데. 저번에 실크로 유명한 터키 부르사에서 금색 실크 목도리를 사 왔는데 6만 원 정도 했었는데. 실크라기엔 너무 싸서 실크로는 믿기지 않았지만(나중에 제미나이에 물어보니 선인장 실크?라는) 뭐 그래도 너무 부드럽고 색감이 예뻐서 모로코 감성으로 하나 갖고 싶었다. 나는 학생이다, 더 깎아줘라, 하니 얼마까지 괜찮냐고 물어서 100이라고 하니 그럼 150에 해주겠다, 그렇게 흥정하다가 120에 해서 만족했다. 관광객과 판매자 모두 만족한 가격은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이럴 경우 결과적으로 관광객은 여전히 결코 싸게 산 것은 아닌데, 페스 한복판에 스카프를 잔뜩 놓고 파는 곳에서 힐끗 보면 가격이 50에 붙어있다. 흠, 나는 아침부터 사서 추울 때 하고 다니고 마음에 드는 걸 골랐으니, 그리고 상인이 직접 만들어서 파는 곳에서 샀으니 뭐 괜찮아. 하고 스스로 정신을 치유하고 달래야 한다.
그렇게 스카프와 반지 쇼핑도 끝내고 뭐라도 마실까 싶어서 카페를 찾아 골목을 걷는다. 지도 없이 그냥 막 걸어보기로 한다. 황토색 높다란 벽에 화려한 색감의 여러 옷과 스카프, 가방을 걸어 놓고 파는 상인들이 많다. 그 화려한 컬러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구경하면서 걷다 보면 너무 재밌다. 좀 예뻐 보이는 옷이 있어서 몸에 대보기도 하는데 여기서 계속 입고 다니고 산다면 한벌쯤 사기에 괜찮은 가격이지만 한국에서 입지 못하는 옷인데 사진만 찍기에는 가격이 좀 있다. 결국 옷을 사지는 못하고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을만한 검은색 가운을 샀다. 사이즈가 라지 밖에 없고 길이가 너무 길어서 아쉬워서 계속 고민하는데 상점에 방문한 무슬림 아줌마가 350이면 가격 진짜 좋은 거라고 너무 잘 어울린다면서 사라고 했다. 좀 사이즈가 작은 다른 색도 입어봤는데 색깔은 검은색이 더 쉬크하다. 상점 아저씨는 속에 입는 거까지 해서 400인데 겉옷만 한다면 350에 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사이즈 큰 게 걸려서 계속 거울에서 이리보고 저리 보고 고민하니까 결국 300까지 깎아주었다. 현란한 모로코 상인들에게는 도저히 못 당한다. 사람을 대하는 장사 수완이 너무 좋다. 그러면서도 관광객에게 착한 가격에 사간다는 기분을 심어준다.
목이 말라서 카페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목 퍽퍽한 아보카드 스무디를 마시며 목을 좀 축였다. 카페도 길에서 만난 청소년 같은 남자애가 좋은 레스토랑이 있다며 안내해 줘서 따라갔는데 숙소와 식당을 겸하는 곳이었다. 가격표를 보니 모든 메뉴가 100 이상이라 마라케쉬에 비해서도 너무 비쌌다. 그래서 음료만 시켰는데, 음료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테라스를 내려다보니 바랜 황금빛 건물들의 빈티지한 뷰가 아름다웠다. 중세 시대 한복판에 들어온 것 같다. 그렇게 조금 쉬다가 나와서 걷는데 손바닥만 한 회색 아기고양이가 다가와 내 다리에 자기 몸을 부빈다. 아악 너무 귀여워서 안 만질 수가 없겠어. 평소 동물을 잘 못 만지고 길고양이를 만지면 위생에 안 좋다고 경고를 받았지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쓰다듬게 되었다. 너무 작고 소중해. 번쩍 들어서 품 안에 안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동료에게 나중에 자랑하려고 동영상도 찍었다.
밥을 좀 먹을까 구경을 할까, 하고 지도를 보다가 주변에 테너리가 있는 것 같아서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가보기로 한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계속 빙빙 돌고, 주변 상인들에게 테너리 가는 길을 물어 물어 가도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테너리가 여러 개여서 각자가 생각한 것과 내가 지도로 찾아가려는 곳이 달랐던 것 같다. 그렇게 길을 헤매서 지쳐서 포기할 때쯤,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늘 금요일이라 부인들이 아르간 오일이며 화장품을 파는 날이라고 구경하고 싶으면 데려가 주겠다는 것이다. 자기는 테너리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오늘은 쉬는 날이어서 나왔는데, 자기는 이렇게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영어도 연습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길을 알려주고 돈을 받는 그런 사람들과 다르며 그냥 선의로 자기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테너리를 가봤냐고 물어서, 아 아직 못 갔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현지인들은 이 복잡한 미로 같은 길도 빠삭하게 알고 있어서 날렵한 몸으로 막 날아다닌다. 남자들은 뚱뚱한 사람이 잘 없다. 웬만한 남자보다 걸음이 빠른 나도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걸음이 엄청 빠르다. 어떤 다리도 지나고 처음 가본 골목을 지나면서 그가 일한다는 테너리에 도착했다. 그는 가는 길에 노랗게 염색되어 널려있는 가죽을 보면서 이건 염소 가죽이다, 하고 알려주고 길 안내를 잘해준다. 지나가는 길에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건다. 현지인들도 있고 누가 봐도 외국인인 외모인 사람들도 있다. 다 아는 동네 사람이거나 쉬는 날 만난 여행자들이라고 해서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서 약간은 의심을 하며 따라가고 있었기에 안심이 되었다. 염색 공장입구에는 옷이며 가방이 형형색색으로 염색된 가죽 제품들을 팔았고,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그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니 테너리 풍경이 펼쳐졌다. 와, 와보길 잘했다. 진짜 진귀한 풍경이다. 염색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그래도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입구에서 그가 손에 들려준 민트향을 맡으면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겠냐고 묻더니 핸드폰을 가져가서 이리저리 사진도 열심히 찍어 주었다.
테너리를 보고 나서 아, 고맙다 하고 약간의 수고비를 주었다. 그는 결코 돈을 바라고 한 게 아니라고 계속 넣어 두라고 했다. 큰 액수가 아니었길래 나는 고마워서 주는 거라면서 다시 건넸다. 돈도 바라지 않고 20분 넘게 걸으며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길도 안내해 준 게 고마워서 이만 헤어지려고 했더니, 유기농 마켓에는 안 가보겠냐고 금요일마다 열리니 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계속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마, 데려다주고 내가 무언가를 사면 인센티브가 있나? 흠, 뭐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또 따라가기로 했다. 그는 나를 데려다주고는 잠깐 쇼핑할 시간을 주고 사라졌다. 근데 막상 좀 너무 비싸서 사지는 않았다. 아마 관광객 용으로 파는 듯싶었다. 향수라도 볼까 했는데 여러 향이 차곡차곡 쌓여 레이어드 된 그런 향수들이 아니라 단일 향만 있었다. 그는 구경하기만 해도 된다고 괜찮다고 했다. 그의 손은 오랜 염색 일로 다 물들어 있었다.
“흠, 배가 고픈데 점심 먹을 데가 있어요? 아까 어떤 식당에 갔더니 너무 비쌌어요.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제가 살게요 “ 하고 내가 물었다.
“오우, 그런 관광객 식당을 가면 너무 비싸요. 그럼 내가 아는 데가 있으니 따라와요. “ 하고 그가 현지인 아저씨들이 잔뜩 모여서 먹고 있는 길거리 식당을 데려갔다. 콩 수프가 괜찮냐고 하길래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괜찮다고 했다. 다 부서져 가는 플라스틱 의자가 몇 개 있는 간이 테이블 한 개 있는 자리에 앉으라고 안내했다. 다른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도 나와 그를 호기심 있게 보더니 다가와서 같이 앉았다. 그는 곱슬머리에 누런 이르러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이거 다해서 20이에요. 하고 그와 나의 콩 수프와 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 다른 상점 친구가 준 작은 생선들의 살을 막 바르더니 나를 먹으라고 테이블에 올려 주었다. 무슨 휴지를 깔고 주는 것도 아니고, 닦지도 않은 테이블 위에 언제 씻은 지도 모르겠는 손으로 발라서 놓아주다니 위생이 중요한 사람들은 기겁할 일이었다. 모르는 아저씨들하고 같이 테이블을 공유하며 길거리에서 밥을 먹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시트콤 같고 재미있어서 혼자 키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