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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Apr 14. 2019

공항 못갈 위기에 만난 러시아인 동지

바르셀로나


문제적 남자라는 퀴즈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최근에 의사 아버지와 의대생 형제 삼부자 편이 나왔는데, 아버지는 청소년기 아이들의 문제해결력을 키우기 위해 아이들과 여행을 자주 갔다고 해서 공감이 갔다. 이 가정은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여행을 갔는데 아이들에게 모두 일정을 짜게 하고 아이들이 길을 헤매거나 실수해도 묵묵히 따랐다고 전했는데, 대단하다고 느꼈다.


여행에서는 일상에서는 닥치지 않는 여러 문제에 직면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를 직접 찾아가야 하고, 예산 제약도 있고 정보도 부족한 데다 언어도 다르다. 날씨가 갑자기 안 좋아지기도 하고, 교통이 마비되기도 하고, 물건을 분실하거나 도둑을 맞기도 한다. 이를 마주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귀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을 마치고 공항을 가려고 공항버스 정류장에 갔는데 공항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다는 푯말을 봤을 때가 생각났다.



아침 일찍 전날 눈으로 확인한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어제 택시 파업이라 길에 세워져 있던 택시들이 그대로 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카탈루냐 광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으로 가니 길이 마비되어 버스를 운행하지 않으니 다른 정류장으로 가라고 쓰여있다. A4용지에 급하게 써 붙어있다.


예기치 않은 일이라 잠깐 당황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길치). 유럽 마지막 날이라 데이터도 다 써서 엄청 느린 상태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어서 지도 확인도 어려운 데다 유로도 얼마 안 남았는데 버스+지하철 표 10회권도 이미 다 써버린 것 같다. 그래도 지하철 탈 돈은 있지만 왠지 추가적인 지출은 아까운 생각이 든다. 사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생각하면 저기서 가라고 하는 에스파냐 광장은 어제 갔던 곳이라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왠지 순간적으로 공항까지 갈 수 있을까 조바심이 들었다.


무거워진 캐리어를 꽉 잡고 A4용지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내게 검정색 뿔테를 쓴 금발의 여성이 다가왔다.


“공항 가는 거죠? 나 여기 어딘지 알아요! 갈 거면 같이 가요!”라고 영어로 말을 걸었다. 상냥한 말씨였다.


“오 맞아요 공항 가는데 이거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당황스럽던 중이었어요. 같이 가면 좋겠네요!”


“지하철을 타야해요. 저기 지하철로 내려가죠!” 금발의 여성은 근거리의 메트로 표시를 가리켰다. 금발의 긴 생머리 여성은 피부가 하얗고 불이 붉었고, 억양이 심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특정할 순 없으나 한 나라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러시아 사람 같긴 했다. 여러 문화를 겪어 본 러시아인.


지하철로 향하는 길. 동지가 생기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어젠 쌀쌀하더니 날은 갑자기 왜 이리 따뜻해졌는지 더워 죽겠다.


“와 갑자기 왜 이리 더운 거예요. 땀이 나네. 나만 더워요?” 캐리어가 무거워져서 그런가, 얇은 코트마저 벗고 싶은 지경이었다.


“아니요 나도 덥네요. 휴. 갈 때가 되니 날이 더 좋아지네. 물?” 금발 여성은 물을 마시겠냐며 자기가 마시던 물을 쿨하게 건넸다. 그러더니 적극적으로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더니 한국이라고 하자 반가워하며 그런 것 같기도 했다며 자기는 블라디보스톡 출신이라 부모님과 서울도 가봤다고 했다. 아 내 생각대로 러시아인이구나. 나도 재작년에 블라디보스톡에 다녀왔다고 반가워했다.


지하철 역에 들어왔다. 그녀는 지하철 표를 사기 위해 기계 앞에 멈추었고, 나는 혹시나 하고 10회권을 찍어보려고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몰랐기에 아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하고 이름을 주고받았고, 내가 먼저 들어간다고 하니 이만 헤어지려는 걸로 오해한 율(편의상 율로 부르겠다)은 자기가 표를 살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니, 나도 같이 갈 생각이지만 표가 찍히면 먼저 들어가 어느 정도 떨어지게 되니 멀리서 이름 부를 일이 생길까봐 물어본 거야.




에스파냐 광장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우리는 캐리어를 끈 사람들 무리로 둘러싸였다. 둘이 가니 안심이 되었다. 위기를 함께 극복한 동지 의식이 생겼다.


“아마 어제 택시 파업 때문에 그런 건가? 어제 만난 할아버지가 엄청 강조하던데. 버스가 여기까지 못 왔나 보네. 노란색을 좋아하나 봐! 나도 요즘 노란색에 꽂혔는데.” 캐리어도 어깨에 멘 가방도 모두 노란색인 율에게 말했다.


“택시 파업? 파업이 뭐지? (내가 파업을 설명해 주었다) 아! 아... 파업!! 그거 때문인걸 수 있겠네. 아 노란색!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오히려 노란색은 안 좋아하는 편.” 율이 말했다.


“바르셀로나 몇 번 와봤다고 했지? 여기서 세금 환급(tax refund) 해봤어? 아 나는 처음인데, 블로그 보니 사람도 많고 복잡하다구 해서 긴장돼. 미리 일찍 가는 건데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겠지?

그리구 모스크바 가서 경유하는데 괜히 한 시간 경유인 표로 사서 연착되거나 짐을 잃어버릴까 걱정이야. 여기서 산 물건들 잃어버리게 된다면 정말 아까울 것 같아. 연착되면 모스크바에서 머물러야 될 수도 있구.” 대화 중에 내가 여러 걱정을 토해냈다.


“택스 리펀 여기서는 안 해봤는데, 괜찮을 거야 걱정 마! 연착 안 되겠지~~ 그리고 혹시나 연착돼도 모스크바 시내 구경할 수 있는 기회잖아! 좋게 생각해!” 율의 말에 기분이 좀 편안해졌다.



전날 찍은 에스파냐 광장


에스파냐 광장에 내리니 캐리어 무리가 한쪽 방향으로 우르르 향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어제 와 본 거기구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내내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율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트 뻬쩨르부르크로 직장을 구해 옮겼고, 부모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신다고 했다. 서쪽으로 여행을 하기에도 유럽과 가까운 뻬쩨르부르크가 좋아서 잘한 선택이라고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서로의 도시를 가보았고, 영어도 잘 통해서 좋았다. 율이 내게 나이를 물어서 알게 된 건데 나이도 한 살 차이인 또래였다. 키도, 체격도, 나이도 여러모로 비슷하고 잘 통했다.


“내가 서울에서 찍은 사진 보여줄게. 보여주고 싶은 사진이 있는데, 참 너는 인스타그램 해? 아이디 알려줘.” 율이 물었다.


“나 지금 인터넷이 안된다. 니 아이디 알려주면 내가 추가할게. 아! 공항버스는 와이파이 잘되던데, 타서 하면 되겠다.” 공항버스 줄을 기다리며 내가 말했다.


공항에 가려는 모든 사람들이 몰려 오래 기다릴 것 같았는데, 터미널 별로 줄이 나누어져 있었고 버스도 여러 대 대기 중이라 금방 탈 수 있었다. 어쩌다 알게 된 율과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되었어도 그냥 조용히 창밖을 보고 공항까지 갈 생각이었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얘기를 하며 공항까지 왔고, 율은 공항 내에서도 각자 일처리 후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쉽게 여러 얘기를 하는 편이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거리를 두는 편이다. 호감이 있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어도 그냥 그 대화를 끝으로 더 이상 인연을 이어나가지는 않는 편이어서 먼저 연락처를 묻거나 연락처를 얻게 돼도 연락을 잘 안 한다. 이미 사귄 친구들하고도 연락을 잘 못하니 새로운 사람들이 쌓이는 것에 어느 순간부터 피로감을 느끼기도 하고 내가 귀차니즘이 심한 사람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런데 율은 먼저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며 연락을 이어나가니, 지금도 서로의 근황을 보며 간간히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비행기가 연착되어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게 되었을 때도 실시간 지식인이 되어주었다.


“아 너는 그래서 영어를 잘하는구나! 나는 평소에 러시아에서 영어 쓸 일이 전혀 없어. 그래서 이렇게 여행하면서 사람들 만나서 영어 쓰는 게 연습이 정말 많이 되고 좋아. 이번에 바르셀로나에 오게 된 것도 미국인 남사친이 여기서 일해서 놀러 온 거거든. 바르셀로나에선 뭐했어? 옷도 사고 쇼핑할 거 많지 않아?” 공항 가는 버스 안에 나란히 앉은 율은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였다고 하자 그래서 영어를 잘 하게 되었을 거라고 말하며(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들끼리는 자주 하는 말인 것 같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영어로 친절하게 길을 말해주던 일화를 얘기하였다.


“아니야~ 너야 말로 영어 잘하는데? 러시아인 억양도 별로 없고 못 알아듣는 말 없고 잘 통하는 거 같아 훌륭해! 아 러시아에서 영어 쓸 일이 없구나! 그래도 유럽 오는 비행기표 싸지 않아? 시간만 있으면 자주 나올 수 있으니 정말 부럽다. 나도 유럽 와서 살고 싶어. 대학원을 오거나, 불가능한 상상 같지만 이민을 오고 싶기두 해. 바르셀로나 쇼핑? 맞아. 사고 싶은 것 정말 많더라. 빈티지 샵도 많구. 근데 롱부츠 하나 사고 엄마 꺼랑 내꺼 에스파듀 사서 돈이 없어서 옷은 못 샀어. 다음에 또 와야지..”


이렇게 30여 분간 여러 수다를 떨다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복잡한 내 일들을 처리할 생각에 만나서 정말 반갑고 대화도 즐거웠다고 말하며, 시간 나면 안에서 보게 생기면 보자고 의례적인 말을 하고 헤어졌다.


그래도 3시간 전에 여유 있게 도착했으니 충분하겠지, 하며 모스크바행 창구로 향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아직 창구가 열리지도 않아 민망했다. 기다려서 비행기표를 받고 세금 환급 창구로 향했다.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기계로 처리해서 빨랐고 블로그의 내용과 달리 간편했다. 우체통을 찾아 헤맸지만 우체통에 영수증을 넣고 해야 하는 과정도 없어졌다. 뭐야 간단하네. 괜히 걱정했어. 해보고 나면 별 것 아니고 실패해도 엄청난 피해도 아닌데 처음 해보는 낯선 일이면 지레 걱정만 앞서는 것은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율은 메시지로 어디냐고 물었다. 일을 다 끝내고 짐을 부쳐 몸도 가뿐해진 나는 이제 막 들어와 터미널 근처라고 보냈다.


-(나) 아우 진심으로 젤라또가 땡긴다. 젤라또나 아이스크림 파는 데 있나 찾고 있어.


-(율) 나도 들어가는 중. 와. 젤라또! 나도!! 나는 목이 미친 듯이 마르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방금 확인해보니 나는 터미널이 바뀌어서 00인데, 어흑 반대편이네


-(나) 나 방금 물 샀어. 괜찮아 내가 젤라또 있나 보려고 니 터미널 쪽 다녀왔는데 엄청 가까워. 그럼 이 근방에 있을게.

라고 메시지를 보내 놓고 돌아다니다 한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이 있는지 메뉴를 탐독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워~ 하며 놀라게 하는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장난 어린 미소를 띤 율이 나타났다.


“어후 깜짝아.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나 아이스크림 보고 있었는데 없다. 아이스크림 파는 데가 없나 봐. 자 여기 물 마셔.” 아쉬움 가득해하며 목이 마르다는 율에게 물을 건넸다. 율은 저기 버거킹에서 아이스크림 팔지 않겠냐며 말했고 우리는 버거킹으로 향했다. 와 천재다.


율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시켰고, 나는 방향을 바꿔 오레오 셰이크를 주문했다. 공항이라 그런지 싸진 않았지만 유로 동전을 탈탈 털 수 있는 기회였다. 3.4유로를 냈다. 버거킹에 앉아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뻬쩨르부르크에도 와. 언제나 환영이야. 우리 집에서 자도 돼. 고양이랑 둘이 살아.” 율이 말했다.


“와 그러면 정말 좋겠다. 언젠가 꼭 가고 싶어. 사실 이번에 모은 돈으로 모스크바랑 뻬쩨르 여행하려고 했는데 겨울이라 너무 추울까 봐. 사실 뉴욕도 선택지에 있었는데 뉴욕에 있는 친구 말이 너무너무 춥다더라구. 너도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해! 아니면 언젠가 뉴욕에서 만나자.”


“좋지. 로컬을 안다는 건 정말 좋아. 그냥 관광지 말고 친구의 일상적인 곳에 가니 뻔하지 않고 새롭잖아. 서울에 니가 있으니 정말 좋다. 뉴욕! 나도 가고 싶다. 러시아인은 비자받기가 정말 어렵거든. 몇 달이 걸려서 정말 오래전에 신청해야 하고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어. 주마다 신청 쿼터가 있어서 지방 도시 가서 신청하는 사람도 있다니까. 그렇게 해도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을까 말까야. 어쨌든, 나도 미국에 너무 가보고 싶어. 어,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넌 30분 더 남았으니 내 터미널 쪽으로 같이 걸을래? 그거 남은 거 다 먹고.” 아직 남은 셰이크를 먹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온라인 비자 절차도 생겨 미국가는 일이 정말 쉽고, 친구나 지인 중에 미국 거주자들도 많아서 뭔가 친숙한데 러시아는 비자 신청이 어렵다 하니 냉전기 미소관계와 영어를 잘 안 배우는 구소련권 국가들 이야기, 언론을 통해서 바라 본 푸틴, 러시아로 망명한 미국인 등등이 머리 속에 떠다녔다.


터미널로 가는 길. 보딩 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율은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다. 어쩌다 영화 얘기를 하다 러시아 영화를 추천해달라니 절대적으로 비추라고 추천할 게 없다고 했다. 뻬쩨르부르크행 탑승이 시작되고, 나도 이제 보딩 준비를 하러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포옹을 하며 마지막 동지애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날 새벽 네시 쯤 율에게 메시지를 남기게 된다


-헤이, 나 결국 연착되서 지금 모스크바 공항 근처 호텔이야. 오늘이랑 내일 시내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데 가야 할 곳 추천해줄래? 대충 붉은 광장 정도만 아는데ㅜ 나 클렌징도 페이스 크림도 다 쓰구 와서 지금 얼굴 땅기는데 급한 대로 립밤 얼굴에 바르는 중ㅜㅜ 너무 비싸지 않게 살 수 있는 러시아 로컬 브랜드 있으면 알려주면 고맙겠다ㅜㅜ 이미 늦은 시간이라 잘 테니 일어나서 보면 답장 달라고 메시지 남기는 거야. 아까 유심 샀더니 인터넷도 잘된다. 아무 때나 편할 때 연락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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