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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Apr 08. 2019

화이트 샹그리아와 파두

리스본



유럽에서 공부하던 시절 스페인 친구들은 크고 작은 파티가 있을 때면 항상 샹그리아나 깔리모초를 직접 만들어주었다. 플라스틱 대야 같은 데에 레드와인을 가득 붓고 여러 과일을 띄운 것이 샹그리아였고, 페트병 콜라와 레드와인을 1:1로 콸콸 부어 섞은 것은 깔리모초라 불렀다(만드는 방식은 다양할 듯하다).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도 달달하게 마시기 좋았다.


같이 생활한 유럽인 친구들은 와인을 즐겼다. 파티를 할 때도 누군가는 와인을 사 오며, 같이 여행을 하면 요리와 함께 먹자고 와인을 샀다. 우리는 보통 소주와 맥주를 즐기며, 저렴한 와인들이 많음에도 ‘와인’ 하면 왠지 고상한 이미지가 강한데, 유럽에서 와인은 대학생들에게도 일상적이었다. 물론 방에 한 학기 동안 마신 맥주 병과 캔을 버리지 않고 가득 쌓아놓은 뒤 퇴실 전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는 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맥주가 확실히 일상적이긴 하다.


서울에서도 친구들과 카페를 가면 아주 간간히 도수가 낮고 달달한 샹그리아를 시켜서 마신다. 추억들이 떠오르는 것만 해도 잘 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마셔본 샹그리아는 전부 붉은색이었다. 그래서 리스본의 한 식당 메뉴에서 화이트 샹그리아를 보자마자 맛보고 싶어 두근거렸다.

바이샤시아두 거리의 낮과밤


그곳은 톤 다운된 여러 색깔들로 칠해진, 위로 갈수록 점점 경사진 동네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파두 레스토랑과 술집들에는 조명이 켜지고 각국의 억양으로 소란해진다. 인기 있는 펍들은 이른 저녁에도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다. 얼핏 들여다보니 머리색도 복장도 다양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다양한 언어와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빈자리에 뒤섞여 앉아 시간마다 진행되는 파두를 감상한다.


어느 곳에 들어가야 하나 어슬렁거리던 중 억양이 무난하고 알아듣기 쉬운 영어를 꽤 유창하게 구상하는 젊은 여자 직원이 전통 의상스러운 옷을 입고 발길을 붙잡았다.


“파두를 들으러 오셨나요? 우리는 파두를 듣는 비용을 받지 않아요. 식사를 하면 무료로 들을 수 있어요. 식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음료만 마셔도 상관없습니다! 정말 환영해요.”


채도가 높은 토마토 레드색 립스틱을 예쁘게 칠해 인상적이었던 그 여성은 억지로 붙잡는 식의 호객이 아니었고, 상냥하며 인상이 좋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기에 음료만 마셔도 파두를 감상할 수 있다는 말에 끌려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직 늦은 밤이 아니라 거의 빈자리였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화이트 샹그리아를 하나 시켰다.


결론적으로 화이트 샹그리아는 레드 와인으로 만든 샹그리아보다 맛있었다. 싱그럽고 상큼하면서도 많이 달지는 않아 전혀 과일주스 맛이 아니었다. 단 맛은 적어 은은한 정도였고 도수가 생각보다 높고 진했다. 화이트 샹그리아는 정말 널리 전하고 싶은 발견이었다. 한 잔에 5천 원 정도 되는 가격에 다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아 어설픈 맛일까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옹골찬 맛이었다.



밤 10시 전후로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파두 공연은 20분 정도 진행되고 약 15분 정도 쉰 뒤 또다시 진행된다. 밝았던 조명이 꺼져 어둑해지고, 수다를 떨던 기타리스트 할아버지들이 걸어 놓았던 기타를 꺼내 잡기 시작하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이국적인 기타 선율이 땡땡하게 울리기 시작하고 벽에 걸려있던 까만 볼레로를 두르는 사람들은 노래할 준비를 한다.


가수들은 레스토랑 내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다 공연시간이 되면 손님들의 테이블 중간중간에 서서 노래를 시작한다. 전문적인 가수인지 다른 직업을 겸하며 저녁에만 공연을 하는 사람들인지, 식당 운영자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가수들은 시간이 되면 서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노래한다. 마이크를 쓰지 않고도 그 소리가 거리로 퍼져 나갈 만큼 성량이 크고 아주 단단한 소리를 낸다. 울림통에서 자체적으로 화음을 쌓는 양 드라마틱한 목소리가 나온다.


내 근처에 있던 젊은 여성이 허스키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단단하게 소리를 뽑아낸다. 머리는 높게 질끈 묶어 오똑한 버선코가 더 눈에 띈다. 전체적으로 검은 복장에 실내도 어두워서 귀에 붙은 작은 진주 귀걸이가 포인트가 된다. 노래를 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게 된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까, 저런 소리를 내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저 여인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인지 알 수 없지만 리드미컬한데도 가슴 절절하게 들린다. 기타 소리는 발랄하고 경쾌한데 반해 이 공간의 공기는 구슬프다.


저 멀리 서있는 노년의 여성이 젊은 여성의 노래를 이어받는다. 크고 풍성하게 웨이브 진 백발의 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 여인은 노래에 심취해있다. 허리가 꼿꼿하며 풍채가 있다. 다른 편에 서있던 노년의 남성이 나이보다 훨씬 젊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받는다. 뒤를 돌 때 보니 어깨 정도까지 되는 흰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자연스레 방향을 틀며 움직이며 손님들과 이야기하듯이 진한 소리를 내며 노래한다. 여유 있게 강약을 조절한다. 정말 멋있다. 전문성과 깊이가 느껴진다.


서로의 노래를 이어받아 완성시키는 무대 속에서 남녀노소, 음식과 공연을 즐기는 손님과 예술가 간에 아름다운 조화를 느낀다. 이들이 쌓은 전문성과 음악의 아름다움에 더해 감동이 배가 된다. 샹그리아로 몸은 따뜻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두 시간 정도 파두를 즐긴 뒤 돌아가는 길. 식당 밖으로 나왔다. 좀 전에 안내해 준 토마토 레드색의 여성은 나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었냐고 물었다. 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역시나 즐거운 말투로 얼마간 대화를 이어나갔다. 진정 자신의 삶을 즐기는 사람 같았고 그녀가 뿜어내는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에 행복이 전염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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