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증명이 아니라 지속이다

by 의지박약사
A quiet, reflective dawn scene of a man writing at a desk, warm natural light, symbols of writing, pharmacy, and family subtly blended in the background._Minimalist, calm, introspective mood, realistic or cinematic .jpg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아이덴티티란 반드시 잘해냈을 때에만 비로소 획득되는 증명서 같은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하나의 이름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남과 다르게 구별되는 고유한 삶의 궤적이다. 남자로 태어나면 이미 남자의 정체성이 있듯, 남자로서 뛰어난 매력을 갖춰야만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약사이자 작가이고, 남편이며 아빠이고, 아들이자 손자이고, 그리스도인이며 친구다. 나는 이 정체성들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도 나름의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이름 가운데 유독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정체성이 있다. 바로 약사와 작가라는 이름이다. 남들이 나를 인정하고 추켜세우고 도움을 건네도, 나는 좀처럼 그 호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신 열등감이 따라붙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회색지대에 머무는 기분이 든다. 늪에 빠져드는 듯한 상실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처음 문전약국에 취업해 처방전을 보고 약을 조제하고 복약지도를 하던 시절에는 약사라는 정체성이 분명했다. 그러나 약국장님과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 경계는 조금씩 흐려졌다.


약국장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게 약사가 되지 말고 목회자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나도 그분이 약사보다는 목회자가 더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목회자가 된다면 그가 믿는 진리에 온전히 헌신하며 더 행복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분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내가 대신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나 역시 목회자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 성경을 묵상해 요약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찾아들으며 글쓰기를 연습했다. 독서와 글쓰기를 훈련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하지만 공부와 약국 일, 교회 일과 육아를 동시에 붙들기에는 삶의 무게가 너무 컸다. 몸은 점점 축났고, 결국 심장에 탈이 났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장점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또렷했고, 교회가 나를 좋아해주었다는 것이다. 반면 약사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고, 경제적으로 쪼들린 삶은 고스란히 가족의 부담이 되었다.


나는 집이 가난해 대학 입학금 300만 원을 제외하고는 졸업할 때까지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모아둔 돈도, 부모의 도움도 없는 상태에서 결혼했고, 부양해야 할 아픈 가족과 새로 꾸린 가정이 동시에 내 어깨 위에 놓였다. 결국 나는 다시 약사로서의 정체성을 단단히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뉜 채 달리다 보니, 오직 한 길만 바라보며 달리는 다른 약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약국 일만 생각해도 되는 그들이 부러웠다. 마치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모두 할 수는 있지만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 모든 언어를 33%씩만 쓰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 내게 어제 한 출판사에서 ‘공부’를 주제로 한 에세이집을 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마치 작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책이 2쇄를 찍은 이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도 느껴졌다. 사실 그 주제로 책을 내고 싶어 이미 원고를 써둔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초고는 부족해 보였고, 누군가에게 보여 조언을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종이를 낭비하지 않을 만큼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편집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그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역시 알고 있다. 다시 읽고, 고치고, 덜어내고, 흐름을 정리해 목차를 새로 짜는 일 말이다.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생각과 떨어진 자신감 때문에, 사실은 내년에 책을 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글을 쓸 몸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달리고, 매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쓰는 훈련을 하기로 했다. 매일 쓰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문장이 태어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약국에 출근해 약을 공부하고 환자를 상담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밤과 주말에는 아내와 아이 곁에 머무는 삶을 계속할 것이다.


그렇게 한 10년쯤 살아가다 보면, 약사로서의 나와 작가로서의 나, 남편과 아빠로서의 내가 서로를 방해하는 대신 서로를 지탱해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각각 33%였던 삶이 언젠가 모두 100%가 된다면, 나는 100%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300%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정체성은 성취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그 자리에 다시 서는 삶으로 만들어진다. 2026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의 특별한 아이덴티티는 그렇게 조용히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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