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나를 처방전 없는 약국으로 부르신 이유가 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데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를 언제까지 이곳에 두실까. 5년도, 10년도 아닌, 가능하다면 아이들 다 키울 때까지 20년쯤은 이 자리에서 버티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욕심일까, 아니면 기도일까. 아마도 그 중간 어딘가일 것이다.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오래 머물고 싶어서 드는 질문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밥에 물을 말아 먹던 기억. 다른 반찬이 하나도 없었다기보다, 바쁠 때는 그게 가장 편하게 내가 차려먹을 수 있는 식사였다. 씨리얼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그 작은 상자가 왜 그렇게 비싸 보였는지. 지금 돌아보면 별것 아닌 물건인데, 그때의 나는 힘들게 일하시는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사달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했다. 가난이라는 말보다, 그 장면 하나가 더 정확하게 그 시절을 설명해준다.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어서 빌려서 결혼했다. 사랑은 있었지만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 괜찮아야만 했다. 처자식이 생긴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빚진 사람으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가장이라는 이름은 그날부터 무겁게 어깨 위에 올라왔다.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자두가 먹고 싶다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별생각 없이 흘려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날따라 자두 가격이 눈에 들어왔다. 2개에 5000원. 비쌌다. 그래서 사주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오늘까지도 그 장면 하나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사랑은 해준 일보다 못 해준 일로 더 선명해진다는 걸, 나는 그 자두를 통해 배웠다.
그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이상하게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눈물이 맺혔다. 그때는 부족하다고만 느꼈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이렇게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늦게 와 닿았다. 행복은 무엇을 더 가져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생기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처자식이 생기는 순간 가장은 죄인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은 잘못해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늘 부족해 보이는 존재가 된다. 더 해주지 못한 것들이 계속 눈에 밟히고, 그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책임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나의 고유한 언어는 어쩌면 ‘미안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영만 교수는 그의 책 『전달자』에서 말한다. 자기만의 언어는 머리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경험을 벼리고 벼리는 과정에서 탄생한다고. 밥에 물을 말아 먹던 기억, 자두 하나 못 사주던 순간, 이 약국에서 매일 서 있는 시간들. 이 모든 것이 나를 설명하는 언어의 재료다. 나는 다른 사람의 성공 지도를 따라 말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내가 살아낸 이 서툰 삶을 그대로 전하는 전달자로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남들과 다른 약국에 서 있다. 복사본이 아닌, 나만의 원본을 만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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