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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Oct 24. 2024

의무와 해방

아빠의 의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모두 다른 답을 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아빠의 의무는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잘 먹이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시골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나는 그 이상의 아빠 역할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내가 어릴 적에 아빠에게 바란 것은 이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지도 않았고, 나를 잘 먹이지도 않았고,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다. 가장 놀라운 점은 아빠가 아빠로서의 의무를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반대로 아빠는 내게 아들로서 충성하고 효도할 것을 요구했다.


  불행히도 나는 아빠의 요구에 부합한 아들이 아니었다. 나는 정리정돈이나 청소를 잘 하지 못했고, 글씨도 예쁘게 쓰지 못했고, 숙제도 하지 않았고, 말도 잘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했다. 아빠가 보기에 얼마나 한심한 아들이었을까 싶다.


  아빠는 그런 내가 걱정되어 저녁에 집에 계실 때마다 나를 앉혀놓고 책상 정리정돈 상태를 점검하시곤 했다. 나는 그 때마다 두려워 떨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무엇을 하든 아빠가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두려웠다.


  여름이를 키우면서 여름이에게 어릴 적 나 같은 모습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아내는 여름이를 키우면서 너무 말을 안 듣고, 뭘 시키면 그 일을 바로 안 하고 느그적거리고 있다고 한탄한다. 아내는 여름이를 키우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새치가 생기고 주름이 늘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이 다 나의 유전자 때문인 것 같아 아내에게 미안하다.


  나는 왜 여름이가 어른 말을 안 듣고 엉뚱한 데 가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분명 내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하기가 싫은 거다. 더 깊이 이유를 파고 들어가보면 그 일이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최대한 미루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차마 자존심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렇다.


  나 때문에, 그리고 나를 닮은 여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서 나는 아빠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잘못을 지적하고 매질을 해 준 아빠에게 조금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아마 그 때 내가 매일 맞지 않았었다면 나는 힘들고 억울한 상황을 견뎌내는 인내심을 기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아이들 체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내가 한 대도 맞지 않았어도 나중에 스스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우쳤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가장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계속해서 지고 앞으로 나아가기가 버겁다고 느낀다. 인생이 힘들다고 느낄수록 아빠를 긍휼히 여기게 되고, 어린 날의 아빠조차 감사하게 된다.


  나와 여름이의 그 유전자가 아빠로부터 나온 게 아닐까 싶다. 아빠도 우리처럼 남들이 시키는 일을 제 때에 맞춰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결혼도 육아도 모두 누군가 아빠를 도와주지 않아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게 실패한 게 아닐까 싶다.


  할머니가 치매를 얻어 늘 골치 썩이는 아들에게서 해방되었듯이 아빠는 알콜을 마셔 정신병을 얻음으로 자신의 실수와 실패와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가족 모두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 혼자만 짐을 지면 된다. 그러면 된다. 최대한 할 수 있을 때까지 버텨내고 싶다. 그렇게 하루하루 가장으로 아빠로 남편으로 아들로 손자로 사위로 살아간다. 솔직히 쉽지 않다. 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 적응이 완전히 되지 않는다. 매일 불안함과 외로움이 내 하루를 스쳐지나간다.


  그래도 어제만큼은 육아, 약국을 비롯한 모든 의무에서 해방된 날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와 유미 누님과 함께 하루종일 서울 시내를 걸어다녔다. 나는 해방촌에 가고 싶다고 말했고, 가이드인 누님은 해방촌 루프탑카페로 우리를 인도해주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자꾸 흘러가 속상했다. 소중한 그 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노을이 우리를 비추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그 노을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 추억은 이 시간은 다시 되살아날 것이라 생각하니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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