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번째 결혼 기념일

by 의지박약사

우리 약국에 오시는 손님 중에 항상 머리카락을 금발로 염색하시는 30대 전후의 여성이 한 분 있다. 가끔씩 남편과 같이 올 때도 있었는데, 남편은 항상 가죽자켓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약국 앞 오피스텔에 사는 부부 같은데 아직 아이는 없다. 여성손님이 가끔씩 임신을 준비한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아기를 가지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지금은 아기를 가지기 전에 먼저 몸을 더 건강하게 가꾸는 시기인 것 같다.

당뇨와 고지혈증이 있어서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다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했다.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 더 속상했다. 그녀는 약국 위 정형외과에 가서 깁스를 하였다. 나는 약국에서 절뚝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운동을 하자마자 뼈가 부러진 걸 보고 나는 그녀에게 당뇨와 고지혈증 뿐만 아니라 골다공증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어제 그 여성손님이 약국에 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죄송한데요......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그 순간 뭔가 느낌이 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지 알 수 있었다.

"병원에서 저 멀리 다른 약국으로 가라고 해서 갔어요. 그런데 약이 없다고 해서 집에 갔다가 오후 다섯시 반에 그 약을 받으러 또 외출해야 했어요. 솔직히 마음이 힘들었어요."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병원과 약국의 관계 때문에 그렇다고만 설명했다. 그 여성손님은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이해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처음에 남녀관계나 부부관게로 오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부랴부랴 쓸데 없어보이는 부연설명까지 덧붙였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인간관계라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도 약사들의 커뮤니티에는 어떤 약사가 2억 5천만원의 권리금을 주고 약국을 양도받아 운영하다가 1년 뒤 재개발 예정지역의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매출이 급감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약사는 7억원의 권리금을 주고 약국을 양도받았지만 1년 뒤 병원이 사라져서 낭패를 보았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그러나 나는 인간관계의 끝판왕은 바로 '부부관계'라고 생각한다. 부부관계는 돈 몇 억원을 주고 받음으로 자신에게 할당한 의무를 이행하는 계약 관계가 아니다. 부부는 서로 남이 아니라, 한 몸이다. 나는 참된 부부라면,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는 결혼을 결심하던 무렵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나의 이런 다짐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결혼한 후 나는 아내에게 자꾸만 희생을 강요했다. 사랑에는 희생이라는 대가가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번갈아가며 서로에게 사랑의 대가를 요구했다. 서로가 원하는 사랑의 결이 비슷했다면 더 좋았으련만, 불행하게도 우리 부부는 자라온 환경도, MBTI도 너무나 달랐다. 거의 극과 극의 성격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남편으로 아빠로 그리고 아들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내 역할들 하나하나를 나의 십자가로 여겼다. 고통스럽지만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내가 믿는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마땅히 짊어져야할 십자가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무거운 십자가를 견디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아내 또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시원케해주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아내도 나처럼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힘으로 그 과정들을 포기하지 않고 통과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외향적인 아내를 보면 가정주부로서 매일 집에서 자녀를 양육해야만 했던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이제서야 아내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14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이제서야 우리 부부는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그동안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꺼풀씩 벗겨내어 보여주고 있다. 아내를 조금 더 알게 되자 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뭔가 선물을 주고 싶어졌다. 나는 어떤 선물이 가장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나는 토요근무를 최대한 줄임으로써 아내에게 나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온전한 토요일을 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아내는 자신감이 생겨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가 더 성장하고 더 행복해하고 더 예뻐지는 모습이 기대되어 행복했다.

결혼기념일이 평일이어서 나는 여느 날처럼 바쁘게 출근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만약 작년이었다면, 혹시라도 아내 마음이 불편할까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결혼한 지 만 14년이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을까 싶었다. 어떻게 그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두 아이를 키워낼 수 있었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서로 맞춰가느라 서툴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참 어리고 순진하고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따식이가 태어났을 때 느꼈던 신비, 고마움, 눈물이 떠오른다. 그 시간은 아직까지도 내 마음에 생생하고도 밀도 있게 남아있다. 결혼은 현실이고, 육아는 전쟁이었다. 처음의 순수했던 사랑과 희생은 우리 인생에 불어닥힌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점차 불평과 불만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 앞에서 주눅들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였고, 힘들고 지칠 때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한 방향으로 걸어왔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함께였기에 해낼 수 있었다. 결혼 15년차가 되어서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결혼은 '완벽한 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도 아내도 솔직히 서로에게 완벽한 짝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14년동안 서로에게 맞춤형으로 빚어졌다. 완벽하진 않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동기화(?)되어 있을 거라 믿는다.

이제 우리 부부는 예전보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기 때문에 왠지 지난 15년의 세월보다 앞으로의 15년이 훨씬 더 행복하고 풍요로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결혼기념일이었던 어제 아내가 저녁에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고,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나는 약국문을 1시간 일찍 닫고, 약속 시간 전에 장미꽃 한 송이를 샀다. 우리는 좋아하는 가게에 가서 컬링 경기를 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지난 날을 추억하고 깔깔깔 웃었다. 베일만큼 차가운 칼바람이 불었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서로를 감싸주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고, 함께 하는 그 자체로 행복했기 때문이다. 별 다른 일 없이 평범한 하루였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결혼기념일이었다.

나는 자기 전에 아내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나와 결혼해줘서, 그리고 나와 살아줘서 고마워."


꽃.jpg


#결혼기념일 #14주년 #부부이야기 #결혼생활 #함께하는삶 #부모가된우리 #가족이야기 #부부성장기 #사랑과성장 #함께걸어온길 #감사한순간 #결혼생활의지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스타틴의 효능,부작용,대체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