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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포근 Mar 15. 2020

화이트데이

똥손의 발악

지금 함께하는 사람을 만난지 어느덧 10여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10개월 동안 우리는 빼빼로데이, 발렌타인데이 같은 자잘한 연인의 날을 지나쳤지만, 둘다 그런 것은 사실 상술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며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이번 화이트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그렇게 사탕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발렌타인데이도 별 감흥없이 넘긴 우리였기에 화이트데이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화이트데이 약 일주일전부터 우리는 삐그덕삐그덕했다.


코로나사태로 인해 일이 바쁘지도, 다른 약속도 없는 우리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다. 그러다보니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기고 그 상한 마음을 풀어주려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화이트데이 전날,


정말 사소한 갈등들이 몇 개 쌓여 내 피로감이 꽤 커졌을 때였다. 특별히 그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지쳐있었고, 티를 안내려했지만 그 지친 마음이 조금씩 삐져나왔다. 평소보다 덜 웃고 덜 장난스러운 나를 보고 그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다. 자신이 뭘 또 잘못한 게 있냐며 계속 물어보고 자신을 안아달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며 계속 웃어보였다. 실제로 그가 잘못한 것은 딱히 없었으니까.


그는 내 달라진 모습이 불안하고 걱정된다며 내가 웃는 모습,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싶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이 그의 위로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있었다. 나를 너무 많이 사랑해주기에 그렇다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점점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정도 덜 웃고 덜 장난스러울 수도 있는 건데. 늘 웃고 장난치는 모습만이 내가 아닌데. 어떨 땐 내가 좀 달라보여도, 내가 거듭 괜찮다고 말한다면 그냥 나를 가만히 안아주고 포근하게 사랑을 말해주면 좋을텐데. 그래도 불안해하는 그가 걱정이 돼서 그를 안심시키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화이트데이 아침,


아침에 깨자마자 한 전화. 그는 다시 나의 웃음을, 나의 장난을 그리워하는 말을 했다. 결국 꾹꾹 눌러내고 있던 버거움이 터져나왔다. 어떤 날엔 나도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괜찮다고 계속 말하면 그냥 안아주고 사랑을 속삭여주면 좋겠다고. 나도 위로받고 싶은데 오빠가 눈물을 터뜨리고 불안해하면 내가 위로를 해야하고 안심을 시켜야해서 버거워진다고.


그는 한달음에 나에게 달려왔다. 미안하다고, 자기는 그게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고. 잘 들어주는 것도 상대가 원할 때, 잘 말해주는 것도 상대가 원할 때, 다독이고 안아주는 것도 상대가 원할 때 그 빛을 발한다는 것을 몰랐다고.


우리는 눈물로 서로를 다시 보았고 단단하고 따뜻하게 서로를 안았다. 악의가 없고 사랑해서 한 말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불만을 말한 나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리고 지쳐있던 마음이 흔적도 없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녹은 마음으로 점심 약속이 있는 그를 보냈다.


그래서 이번 화이트데이는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유튜브를 열심히 뒤져 가지고 있는 기구들과 똥손인 나의 실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디저트를 골랐다. 사실상 딸기가 다하는 거라고 봐야하는 '초코 퐁당 딸기'와 사실상 엄*손 파이가 다하는 거라고 봐야하는 '빨미까레(초코 퐁당 엄*손파이)'.


솔직히 하는 거라곤 초콜릿을 중탕해서 딸기나 파이에 찍어서 굳히는 것, 그 위에 약간의 데코레이션을 하는 것 뿐인데 똥손에게는 그것조차 왜 이렇게 어려운지 ㅠㅠㅠ 짤주머니 태우고, 중탕하다 물들어가고... 부엌은 전쟁터가 되었고 그 난리통에 장장 네시간이 걸렸다.


하아.. 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공들여본 선물. 완성하고 나서는 빨리 주고 싶은 마음에 엄청 들떠있었다. 예상대로 그는 눈물이 핑 돌만큼 (착각인가?ㅎㅎㅎ) 감동을 받았고 이렇게 정성스러운 선물은 정말 처음이라고 이야기했다. 대학교 새내기시절 처음 본격적인 연애를 하며 만들어본 빼빼로 이후로는 이런 디저트를 만들어 줘본건 나도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나는 내가 봐도 낯설 때가 많다.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끔하는 사람과 함께인 것이 낯설지만 행복하다. 역시나 연애는 나의 많은 면들을 마주하게끔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번 화이트데이는 특별한 날로 우리에게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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