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미소가 관계를 무너뜨릴 때

by 김성훈

살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것 없이 서툰 기분이 들면, 그저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다시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유난히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가정’이라는 말의 내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톨스토이는 이 한 문장으로 압축했습니다. 정말 대가다운 솜씨입니다. 그 무너짐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시나브로’라고 표현하는 그 감각대로 아주 서서히, 천천히 진행됩니다.


사실, 무너짐에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요? 내 안에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감정들이 제때 조율되지 못하고 쓰러질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의 답안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블론스키 집안은 지금, 무너지고 있습니다. 진행형 입니다. 그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독자의 눈을 뗄 수 없는 건, 소설이 구조를 갖추고 있는 서사라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더,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의 파탄을 눈앞에서 다시 겪는 듯한 긴장감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스테판은 아내가 고용했던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웠고, 아내 돌리는 침묵 속에 방 안에 숨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잃은 것처럼 집안을 마구 뛰어다니고, 가정교사는 짐을 싸고 요리사는 식사 시간에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그 집에 소속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집을 떠나고 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듯한 풍경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남편 스테판은 유쾌한 꿈을 꿉니다. 황홀하기까지 한 굼. 그는 반성도, 고백도, 설명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태연한 얼굴 대신, 몸에 밴, 어리석고 선량한 미소를 지어버립니다. 습관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어리석은 미소를 긍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 나도 그런 미소 하나쯤은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 그저 잠시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내 진심을 감추고 꺼내든 미소. 그건 상대방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방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성이 부족해서? 사교성이 없어서? 그보다는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른인 척하려고 거내든 습관적인 표정.


스테판은 말합니다.

“허물은 내게 있다. 그렇다고 내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변명은 지금 우리의 사회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과 흡사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회피.” 특히, 책임 회피.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것 같은 날, 당신은 어던 방식으로 감정을 회복하시나요? 저는 그럴 때 톨스토이의 책 『안나 카레니나』를 펴고 한문장씩 따라 타자를 칩니다.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내 안에 어떤 감정이 머물고 있는지, 타자 소리에 맞춰 조금씩 엿보기를 시도합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 그 이름을 찾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어리석은 미소를 지었나요?

그 미소를 진심으로 바꿔 본 적은 있나요?”


오늘 저는 이 문장을 안고 하루를 버텨보려고 합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어리석은 미소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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