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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엄마를 증오했다 (퇴고 ver)

물, 그림, 엄마를 읽고

by 거북이

엄마가 아프다. 심각한 병은 아니지만 만성위염을 앓고 있어 먹는 것을 잘 섭취 하지 못하고 있다. 몸무게는 한달 새 5키로 이상이 빠져 원래 말랐던 몸이 더 앙상하게 보인다. 주에 한 번씩 아내와 함께 전화로 안부 인사를 전하는데 어느새부터인가 엄마가 전화를 먼저 받지 않고 아빠가 대신 받기 시작했다. 아마 아프고 힘없는 모습을 유일한 자식인 나와 며느리에게 들키기 싫었나 보다.


엄마는 부산 소재의 상고에 진학하여 외환은행에서 20년 가량을 근무했다. 두 삼촌의 대학진학을 위해 일찍이 사회 전선으로 나가야 했던 엄마는 그 시절 여성이 밟을 수 있는 엘리트 코스를 따라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학에 진학하여 좀 더 공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학창시절이 힘들었다. 엄마는 나를 SKY에 보내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선행 교육을 시켰다. 동네의 유명한 학원으로 가 수학의 정석과 개념원리를 풀었다. 아직 뇌가 말랑말랑한 어린시절 내가 삼차 방정식과 근의 곱칙 등을 제대로 이해할리 없었다. 매일 숙제를 하고, 숙제를 하지 못한 날에는 선생님의 체벌이 있었다. 엎드려 매를 맞을 때 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다짐하기 보다 ‘이게 성숙한 성인을 길러내는 바람직한 방법인가?’반항심이 앞섰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 암흑 같은 상황을 도망치곤 했다.


오토바이를 타거나 길거리에서 침을 뱉으며 담배를 피지는 않았다. 그저 학원에 가지 않으려 PC 방을 가거나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을 뿐이다. 중학교 2학년 겨울의 어느 날 발가락이 깨질 것 같이 추운 날씨에 학원 친구들과 함께 연합팀을 꾸려 축구를 하는 중이었다. 한참 축구를 하고 있는데 함께 뛰고 있는 친구들이 웅성웅성 하기 시작했다. 왜 인지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서 익숙하게 다가오는 실루엣과 함께 크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KBM 너 지금 공부 안하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엄마였다. 나는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엄마에게 땡땡이를 친 것이 들켜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있을 또래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이 그려졌기 때문에 나의 처지를 걱정했다.


상대방의 치부가 드러나면 공격하는 게 함께 어울리던 남자 아이들의 습성이었고, 나는 그날 엄마라는 치부를 그들에게 보여 주고야만 것이었다. ‘아 시발 존나 쪽팔리네’엄마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마음 속에서 요동쳤다. 그 날 이후부터 엄마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학교와 학원 장소를 망라하고 놀림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작아 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나를 보듬어 줄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니 자신감이 없고 우울했다. 엄마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았다 생각했고, 증오의 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늘 치마 폭으로 나를 감싸려는 엄마에게 굴복하지 않기 위해 반항했고, 해서는 안될 욕을 하기도 했다. ‘시발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핸드폰을 던지기도 하고 벽장을 주먹으로 쳐 벽이 움푹 페이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를 증오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결국은 엄마가 원하는 SKY나 인서울을 하지 못했다. 본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에게 엄마는 실망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대학에 가서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잔소리는 이어졌다. “공무원 시험 준비해 봐라”, “지금은 돈을 모을 때인데 왜 외제차를 샀냐?”, “자식은 언제 가지냐?”. 나는 성인이 되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런 엄마의 잔소리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 대로만 한다면, 사회가 규정하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이 말은 즉 엄마의 입에서 나에게 향하는 그 많은 말들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한 소리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엄마의 말들을 거부하고 있다. 엄마처럼 현재의 행복을 감소하면서 까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만을 바라보는 삶도 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언젠가는 심각한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교통 사고를 당하여 생을 빨리 마감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내가 하지 못한 것을 후회 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카지노에서 코인을 넣고 행운을 위해 레버를 당기는 것처럼 나는 인생에서 마주칠 수 있는 레버를 적극적으로 당겨볼 생각이다. 그게 나의 행복에 다가가게 되는 지름길이 될 테니까.


엄마가 아파 잔소리가 줄어든 지금 사실 귀가 심심하기도 하다. 그리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던 엄마도 영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잠시 엄마의 죽음으로 길고 길었던 우리를 연결하고 있던 끈이 끊어지는 것을 상상했다. 엄마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엄마에게 전하는 작별인사는 무엇이 되면 좋을까? 늘 엄마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작별의 순간에는 나만 말을 하게 될 수 있겠지? 아.. 마지막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이제 풀리지 않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엄마를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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