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월 아이와 세부여행 첫날

영유아 가족 해외여행 ep 01

by 거북이

아이가 생긴 이후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필리핀 세부, 한 겨울에 굳어진 몸을 녹이고자 따뜻한 휴양지를 목적지로 택했다. 약 5시간의 비행, 태어난 지 약 17개월 된 아이가 비행 중에 짜증 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가방에 보부상처럼 싸간 짐꾸러미가 아이의 지루함을 달래는 데 정도의 보탬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으면 간식이나 스티커 북을 꺼내어 아이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돌고래, 사자, 산타 스티커가 비행기 창문이나 나의 얼굴에 붙여졌다


걱정했던 것보다 무탈하게 비행기에서 시간을 보낸 우린 5시간 만에 계절이 바뀐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낯설어진 여름의 날씨와 습도는 등줄기에 땀을 흐르게 한다. 맨투맨 티를 입고 있었는데 그랩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긴팔 티셔츠를 벗어 반팔로 갈아입었다. 후덥지근한 날씨 덕에 처음 만난 택시기사에게 반나체를 보여줄 정도로 용기가 차올라 있다.


덜컹덜컹 도로는 역시나 한국처럼 상황이 쾌적하거나 매끄럽지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 보였다. 인간의 편의에 의해 기술로 자연이 변형된 서울과 대비해 이곳은 ‘자연미’가 느껴진다고 할까? 거리 곳곳에는 잡화, 음식 등 작은 상점이 다닥다닥 사이좋게 붙어 있다. 오래전이지만 세부에서 3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하였던 아내는 나에게 관광 안내자가 되어 이것저것 설명한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필리핀 사람들은 흥이 많다고 한다. 부산하게 도로 위를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직접 대화해 보진 못했지만 함께 어울리는 그들의 정서가 간접적으로 체험이 되었다.


차로에 신호등도 제대로 없지만 놀랍게도 경적을 울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도로가 잘 개발되지 않아 운전자의 스킬이 자연적으로 뛰어나진 것도 있겠지만, 운전자끼리의 무언의 배려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 같다. 도로에 규칙이 없지만 규칙이 없어서 서로가 더 운전을 잘 해내야겠다는 마음인가 보다.



26일부터 30일까지 4박 5일 묵을 숙소 샹그릴라 호텔에 도착했다. 깔라만시 웰컴 드링크를 마시면서, 체크인을 한다.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는 아이가 귀여웠는지 직원들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이와 여행을 하면 여러 제약이 있지만 이런 것은 어드벤티지 중 하나다. 아이 덕에 대게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기 때문이다. 호텔 시설 너머 멀리 바다가 보여, 괜스레 코를 킁킁대며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 노력한다.


체크인을 하고 5층 투숙실로 들어와 방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트윈 베드에 아이의 작은 침대가 놓여있고, 발코니를 열면 호텔 가든과 시야에서 20% 정도 살짝 보이는 바다를 구경할 수 있었다. 욕실의 수압도 체크차 물을 틀어 보는데 콸콸콸.. 주변의 환경, 시설 등 아이와 함께 여유와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떠나온 여행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환경적 요건은 모두 갖추고 있다.


문제는 나의 컨디션.. 이틀 전 신규 사업 제안서 제출로 밤을 새워 머리가 아직도 몽롱하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니 좀처럼 하루 만에 신체가 회복되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 좋은 배경을 두고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하드웨어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국적인 관광지에 왔지만.. 무거운 몸을 겨우 이끌고 나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모닝 글로리라는 근처 맛집으로 향했다.


공심채, 매운 쌀국수, 튀긴 오징어 등을 주문하고 허기진 배를 채운다. 아이의 식사도 동시에 챙겨야 하기에 음식을 제대로 씹고 넘길 여유는 없다. 아이는 마주하는 환경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아기 의자에 앉아 지속적으로 짜증을 내며 울어댔다.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는 손님에게 폐가 될까 노심초사하며 식사를 하다가 짜증에 못 이겨 손을 잡고 식당 주변을 잔 걸음으로 빙빙 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는 듯 둔하고 불편한 느낌이 있다. 소중히 의견을 들어야 할 껌딱지이자 VIP이기에 신경이 나뿐 아닌 타인에게도 향해있기 때문이다. 아직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기라 여행을 하는 데 더 어려움이 있다. 말을 할 수 있다면, 불편함과 짜증 나는 감정을 조금 더 섬세하게 다뤄볼 텐데 그것이 불가하다.


아이가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식당 바닥에 음식물을 잔뜩 떨어트려 눈에 거슬리는 것이 투성이지만, 이때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이겠지 하며 짜증 섞인 마음을 다스린다. 여행의 시작부터 확실히 둘이 하는 여행만큼 자유롭거나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이런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온다.


식사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르지만 잠을 몇 시간 만이라도 청해야 할 것 같아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침대에 누웠다. 아내와 아이는 호텔의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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