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없는 자유, 키키가 설계한 기분 좋은 망상

키키(KiiiKiii)가 설계한 기분 좋은 망상 『Delulu Pack』

by HaNdNoTe
좌표 없는 자유, 키키(KiiiKiii)가 설계한 기분 좋은 망상 『Delulu Pack』.png KiiiKiii Delulu Pack The 2nd EP

KiiiKiii 키키가 두 번째 미니앨범 Delulu Pack으로 돌아왔다.

나는 2025년 디지털 싱글 「DANCING ALONE」을 리뷰하면서 티키가 되었다. 그해 여름은 댄싱얼론과 비사이드 트랙인 「딸기게임 (Strawberry Cheesegame)」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댄싱얼론의 해외 리액션 영상, 댄스 커버, K-Pop RPD 반응까지 줄기차게 찾아본 건 단순한 취향을 넘어, 이 그룹이 세상에 좀 더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냉정했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케이팝 메인스트림의 포맷에 최적화된 곡은 아니었고, 디지털 싱글이라는 형식적 한계와 아쉬운 프로모션이 겹치며 과소평가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았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Delulu Pack은 단순한 컴백이 아니라, 팀의 사운드 전략을 재정렬한 결과물에 가깝다.

이미 널리 알려진 앨범 명의 의미나 콘셉트 설명은 접어두자. 많은 리뷰들이 이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나 역시 그 이상의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tempImagejdfZrT.heic Delulu

선공개 트랙 「Delulu」는 몽환적인 하우스 비트 위에 나른한 보컬을 얹었다. 하우스 음악의 날카로운 자극을 거의 걷어낸 채, 몽글한 톤과 부드러운 진행으로 일관한다. 자극보다 바이브를 느끼는 곡인 만큼, 트랙 필름 형식으로 공개된 영상과 함께 감상하면 이해가 한결 깊어진다. 몽환적인 영상 위로 긴 디졸브를 이용해, 세련됐지만 촌스럽고, 진지하지만 유머러스하며,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놀랍지 않은가? 키키 멤버들의 연기는 놀랄 만큼 자연스럽다. '망상(delulu)'이라는 단어를 자기비하가 아닌 자기 긍정의 언어로 재장전하는 방식은, 세대의 밈을 흡수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키키의 시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타이틀 「404 (New Era)」보다 이 트랙이 더 좋다.

tempImagedP79sx.heic 지유

이어지는 타이틀 「404 (New Era)」는 요즘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LDN Noise의 작업물로, 같은 프로듀서의 손을 거친 f(x)의 「4 Walls」와 ENHYPEN의 「모 아니면 도 (Go Big or Go Home)」는 지금도 즐겨 듣는 트랙이다. 웹 오류 코드 '404 Not Found'를 '좌표 없이 존재하는 자유'로 뒤집는 영리한 발상에서 시작하는 이 곡은, 「Delulu」에 비해 확실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훅을 갖추고 있다. 저음과 독특한 발음을 구사하는 키야와 이솔의 역할이 분명하고, 하우스 기반의 리듬 위에 드럼 루프를 레이어하며 활기를 더한다. 다만 그 결과로 사운드가 다소 지저분해지는 아쉬움도 있고, 브릿지를 제외하면 동일한 4마디 코드 진행이 반복되어 단조롭게 느껴지는 지점도 솔직히 짚고 싶다. 그럼에도 벌스, 프리코러스, 코러스가 각기 다른 인상을 주는 점은 영리하다. 시스템 바깥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그룹의 정체성을 가사와 MV로 선명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득 NewJeans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만 뉴진스의 감성이 외향적인 E라면, 키키는 내향적인 I에 가깝다. 최근의 호성적은, 대중들 역시 이 내향적인 아웃사이더들에게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신호로 읽어도 될까?

tempImageUBABZP.heic 이솔

언더독스 「UNDERDOGS」는 이 앨범의 숨겨진 명곡이다. 아니, 이미 팬들 사이에서는 명곡으로 자리를 잡았으니 '숨겨진'이라는 말이 민망하기도 하다. 「DANCING ALONE」이 가졌던 아련한 정서를 잇는 곡으로, 변칙적인 리듬이 후반부로 갈수록 빨라지며 감정을 끌어올리는 구조가 핵심이다. 특히 브릿지에서 '꿈이 아니야' / '또 역전이야'라는 가사와 맞물리는 순간은, 눈가를 촉촉하게 만드는 종류의 경험을 준다. '뉴 패턴이야'라는 가사 역시 「404」의 세계관과 같은 맥락으로 읽히며, 트랙과 가사의 조합이 감정이입을 순도 높게 이끌어낸다. 단점을 굳이 꼽자면 프리코러스가 다소 정석적인 케이팝의 문법을 따른다는 점인데, 그것이 타이틀 자리를 내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tempImagec90Xia.heic 수이

「멍냥」은 몽환적인 인트로부터 분위기를 장악한다. 벌스–프리코러스–코러스–포스트코러스가 매끄럽게 이어지고, 브릿지와 아웃트로까지 불필요한 군살이 거의 없다. 느린 템포와 독특한 리듬, 몽환적인 보컬이 결합해 앨범 안에서도 이질적이고 매력적인 지점을 만들어낸다. 가사와 리듬감 덕분에 묘하게 질척이는 느낌도 드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필자의 감상이니 신경 쓰지 마시라. 리믹스가 된다면 가장 흥미로울 트랙으로 꼽겠다.

tempImageT0VCiL.heic 하음

「Dizzy」는 묘한 중독성이 느껴지는 곡이다. 트랙만 놓고 보면 딱히 튀는 것 없는 무난한 구성처럼 보이지만, 보컬 멜로디 라인이 이상하게 맛도리다. 부르는 사람도, 호응하는 관객도 덩달아 즐거워질 것 같은, 그런 기분 좋은 바이브가 있다.

tempImageSduMRR.heic 키야

「To Me From Me (Prod. TABLO)」는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물음표가 붙는 트랙이다. 시스템 바깥에서 자신만의 좌표를 그리던 키키가, 이 곡 안에서만큼은 가장 정석적인 케이팝의 문법으로 귀환한다. 한국어 가사 비중이 높다는 점이 유일한 장점인 게 아이러니하지만, Delulu Pack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이 곡의 자리는 끝내 어색하다. 차라리 앨범의 콘셉트에 맞게 새로운 리믹스 버전을 수록했다면 어땠을까?


2026년의 1월, 이토록 응원하고 싶은 팀으로부터 완성도 높은 앨범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무적이다. 키키는 이제 홀로 춤추던 아웃사이더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시스템의 오류를 성장의 동력으로 치환한 이들이, 다음에는 또 어떤 '뉴 패턴'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분명한 것은, 대중은 이미 키키가 설계한 이 기분 좋은 망상에 기꺼이 동참할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이다.

tempImageNAEy7k.heic KiiiK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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