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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Jan 10. 2022

당장 죽을병이 아니면 아파도 되나요?

그 의사 사이코패스 (1)

나 너무 무서워.

 유방암 수술   번째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언니가 내게 말했다. 유방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수술을 앞두고도,  수술 직후에도  의연했던 언니였다. 암환자답지 않은 침착함과 초연함으로 무장했던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언니는 손에서 땀이 나는지 연신 손수건을 쥐었다 폈다. 겁을 먹은 낯선 언니의 모습에  이유를 물었다. 진료실 문을 바라보던 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술 후 첫 진료였어. 수술 전에도 몇 번이나 누워봤던 진료실 침대인데 언제 누워도 익숙해지지 않더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여자들끼리 있을 때도 옷을 잘 벗지 않잖아. 내 몸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게 죽도록 싫은데 여기선 어쩔 수 없어. 삭막한 진료실 안에서 낯선 남자에게 가슴을 맡겨야 한다는 무력감을 넌 모를 거야. 딱딱한 침대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짐승이 된듯한 기분이 들거든. 체념은 점점 빨라지지. 그날도 그냥 그런 날들 중 하나 일터였어.

무기력하게 가슴을 열어둔 채 누워 있었지.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어. 차가운 손으로 수술 부위를 꾹꾹 누르니까 저릿한 통증과 함께 불편함이 밀려왔어. 수술 직후니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참고 있었거든? 근데 정말 순식간에 그 일이 일어난 거야. 잠깐 가슴에서 손을 떼는가 싶더니 온몸의 털이 쭈뼛설 정도의 통증이 가슴을 찔렀어. 강렬한 아픔에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몸이 반응하더라.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양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거야.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신음소리조차 못 냈는데, 교수가 이렇게 묻더라고.


"왜 이렇게 손에 땀을 흘려요?"

"...... 너무 아파서요."

"이게 뭐가 아프다고. 수술 부위 고름 빼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통증 사이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 그러나 이미 머릿속은 엉망이었지. 왜 고름을 뺀다고 알려주지 않았지? 왜 주사를 놓는다고 말도 안 하는 거야? 이렇게 아픈데 뭐가 아프냐고? 온갖 질문들이 소용돌이쳤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어. 실제 진료 시간은 10분 남짓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어.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이 나를 잠식했고 진료 전에 생각해뒀던 질문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어. 몸을 일으키고 나서도 통증과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거든. 내가 진료실을 나갈 때까지도 교수는 어디 불편한 곳은 없냐, 혹은 아프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어. 내 상태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더라고. 진료실 밖을 나와서도 한참을 생각했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두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감기 때문에 주사를 맞을 때조차도 주사 고지를 해주는 세상이거늘, 예고 없는 고름 추출이라니. 그러나 하얗게 질린 언니의 표정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황당한 얘기에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순간 진료실 앞 화면에 언니의 이름이 반짝였다. 간호사의 호명과 함께 우리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이 온통 하얀 진료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교수가 안경을 쓴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갔지만 딱 한번 눈길을 줬을 뿐 다시 모니터를 향한 시선은 한동안 우리에게 향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교수의 방송 출연 사진들,  또 언니에게 말로만 들었던 그 딱딱한 갈색 침대. 어색한 침묵의 시간 동안 내가 진료실을 다 훑어보고 나서야 교수가 입을 열었다.


"좀 어떠세요?"


 딱딱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같은 질문이라도 한참 다를 수 있지 않는가.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혹은 어디 아프시진 않으세요 하는 말에는 걱정과 위로가 담겨있지만 그의 '좀 어떠세요'는 그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걱정이 교수의 의무는 아니라지만 적어도 환자에 대한 배려는 있어야지. 더불어 그의 말 이면에서는 '내가 수술을 했는데 문제가 있을 리 없지'하는 모종의 확신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이 느낌은 이내 현실이 되어 찾아왔다.


"먹고 있는 약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고 쉽게 피로감을 느껴요. 며칠 전에는 산책하다가 쓰러질 것 같아 여기 응급실을 왔었어요. 혹시 약 부작용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

"네?"

"그 약 먹고 부작용 있다는 환자 못 봤거든요."


확신에 찬 대답에 두 번째 말문이 막혔다. 부작용을 호소하는 언니를 직접 지켜본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약 복용 후 발생한 증상들 때문에 괴로워하던 모습이 선한데 약 때문이 아니라니. '내가 처방한 약이 부작용 있을 리 없어'하는 당당한 표정을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미 겁에 질린 언니가 입을 다물자 보다 못한 내가 나섰다.


"처방해주신 약이 혹시 부작용이 없는 약인가요?"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입니다."

"언니가 약을 먹고 나서부터 이런 증상들이 나타났거든요. 그래도 약이랑 상관없는 일인가요?"

"네. 약 부작용이 아닙니다."

"혹시 수술 후유증일까요?"

"수술 후에 별 이상 없으셨습니다. 사진상으로도 그렇고."

"그러면 갑자기 왜 없던 증상이 생겼을까요?"

"글쎄요. 이런 증상 호소하시는 건 환자 분 뿐이라. 약 부작용은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나까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 의사는 전혀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네이버에 해당 약 부작용을 검색하면 수백 건의 게시글이 나온다. 언니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교수는 '너 혼자 유난이야'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모든 의문을 일축시켰다. 당장 죽을병도 아닌데 예민하게 구는 환자가 된 것만 같아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실제 상황을 재구성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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