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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Apr 25. 2024

생장, 까미노로 가는길

순례자 모드 ON





2023년 9월 19일

새벽 4시 가 조금 넘은 시간 알람 소리에 마지막으로 등산배낭 짐을 체크했다.

 고심하던 판초우의를 빼고 가볍게 가기로 결정했다.

가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지만 나의 고어텍스 점퍼를 믿어 보기로 했다.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가 일어나 아마도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한참 새벽시간이라 가로수도 다 꺼져 있는 새벽에 어떻게 갈지 언니와 시물레이션을 돌려봤었다.

우선 내가 캠핑용으로 가져온 충전용 랜턴은 너무 크고 밝아서 언니네 집에 있는 데카트론 헤드렌턴과 교환을 해 가져갔다.

작고 가볍게 짐을 줄여 가는 게 중요했다.


주방으로 이동을 하니 언니가 마지막으로 안전하게 길을 가도록 기도를 해주셨다.

언니의 기도에 마음이 전달돼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초코잼 샌드위치와 치즈햄 샌드위치 이렇게 4개를 도시락으로 싸서 보조 가방에 넣었다.


이곳은 나에게 길 잃은 순례자의 피난처였다.

프렌치 길의 시작은 생장이었지만 나의 까미노 길의 시작은 파리였다.


나는 집을 나서며, 언니네 가족의 안녕과 무사히 길을 걷다 올 것을 기도하며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7시 11분 까지 차를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몽파르나스 역에 6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헤매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여유 있게 삼십 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새벽 5시

길이 어두워서 언니가 줬던 데카트론 해드렌턴을 머리에 차고는 불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익숙하게 걸어야 할 길이기에 예행연습처럼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중이었다.


집을 빠져나와 첫 건널목을 건너는데 익숙한 차 한 대가 가까이 다가와 창문을 내렸다. 형부가 마침 출장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나와 마주친 것이었다.


인사를 못 드리고 가서 아쉬웠는데 형부는 차에 타라고 손짓을 했다.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5분 정도 인사를 나눴다.


형부:이제 괜찮아요?

잘 쉬었어요?


나:네! 잘 쉬었어요. 이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 힘들면 저는 10월 초에 돌아올 거예요.

일단 생장에 도착해 조금이라도 걸어봐야 할 것 같아요.


형부:10월 초에 바르셀로나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단아와 차를 타고 스페인 여행을 갈 거예요.

혹 여행이 끝난다면 거기서 만나요.


나: 10월 초에 돌아온다면 프랑스 어학원에 등록하고 불어 공부를 하고 싶어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 비앙또(또 만나요.)




우리의 짧은 대화는 지프-슈흐-이베트 역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고, 나는 익숙하게 지하철을 탔다.


새벽 아침열차에는 일찍 일하러 나가는 직장인들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거의 한 칸을 내가 전세 낸 것처럼 텅텅 빈 열차 칸에서 배낭을 여유롭게 내 옆자리에 앉혀 두고는 프랑스 네비앱 일레-드-프랑스-모빌리떼 앱을 켰다. 어디 역에서 내릴지 안내를 받아 몽파르나스까지 가야 했다.


마르셀의 여름


영화 ”마르셀의 여름“ 같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2주간의 파리살이가 기차를 타러 가는 바깥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반짝 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지난번 몽파르나스역에서 했던 예행연습 덕에 나는 익숙하게 전광판을 찾아 3층 승강장 1번 게이트로 이동했다.


잠을 깨우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셨었지만 새벽잠을 깨우기엔 부족한 양이었다.

커피를 마셨으니 당연히 화장실도 급해서 1유로를 내고 화장실 볼일까지 봐야 했다.


제일 아까운 비용이긴 한 것 같다 조금만 참으면 기차 안에서 볼일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몽파르나스역


몽파르나스역은 무지 크기 때문에 화장실을 가려면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야 했다.

1번 게이트의 보르도 생장 게이트 앞에는 나와 비슷하게 배낭을 메고 순례길을 떠나기 위해 길을 갈법한 행색의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관광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순례자 모드로 여행모드를 변경할 차례였다.


새벽 일찍 문을 연 빵집은 고소한 크루아상 냄새와 커피 냄새가 아직 아침잠이 안 깬 여행객들을 잡아끌어서 길게 줄을 늘어서게 했다.


2주간 언니네 집에 있으면서 여행자처럼 돈을 써보질 않았다가 익숙하게 이제는 트레블 월렛으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본 주흐!

주브드헤 앙 아메리카노 실부플레!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멕흐시!

오흐브아!


외국인이 하는 한국어가 어색하지만 귀여워 보이듯

아마도 그들의 눈에도 어색한 에흐 발음이지만

불어를 애써 발음하는 모습이 조금 더 서로에게 배려하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듯하다.


생장까지는 바욘 역을 거쳐 생장역까지 5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계획대로라면 1시 30분 즈음 생장역에 도착해서 크루덴셜 순례자 여권을 받고 처음으로 공립 알베르게인 55번가 SJPP Municipal Albergue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우선 첫날부터 일찍 도착하는 시간대라 도착에 운을 걸었다. 공립 알베르게만이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숙박을 할 수 있어서 나는 그곳을 나의 첫 숙소로 정한 것이다.

대부분 수비리까지 숙소 예약을 하고 길을 떠나지만, 나는 론세스바예스 외에는 예약을 해놓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차 밖 풍경


드디어 7시 11분

날렵한 커터칼 같이 생긴 TGV에 올라타고 출발!

문쪽 맨 구석 창가자리 자리 잡고 앉았다.


내 옆에 앉은 프랑스 아저씨는 앉자마자 내 행색을 보더니 수다스럽게 질문을 퍼부어댄다.

일찍 일어나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눈이 자꾸만 감겼다.


나는 아저씨의 친절이 고맙지만 졸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잠을 자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저씨는 바욘에 사는 분이라고 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바욘에서 하루 정도 동네를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진격의 산티아고 행을 택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는 내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여유롭게 주변을 살펴 순례길을 갈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 나에게 그것이 최선이었다.

억지로 눈을 감고는 부족한 잠을 채워 넣었다.

새벽부터 길을 나서기 위해 4시부터 시작한 19일의 하루가 이제야 동이 트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남프랑스의 동화 같은 풍경이 바깥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여행은 니스와 파리 그리고 리옹과 몽쉘미셸이 다였기 때문에 남프랑스는 생소하고 미지의 장소였다.


최근에는 각종 여행 프로그램에서 프랑스 남부 소개를 많이 하지만 나에겐 와인 이미지 밖에 없는 생소한 곳이었다.


내가 꾸는 악몽 중에 하나인 모르는 해외 어딘가에 땡전 한 푼 없이 떨어지는 장면이 꼭 지금 같을 거란 말이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서 사실 잠이 잘 오진 않았다.  눈을 뜨고 있으면 옆에 앉은 수다쟁이 프랑스 아저씨가 계속 말을 걸 태세였기 때문에 계속 눈을 감고 있거나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씩 작은 역들에 정차할 때마다, 나는 흡연자들 행렬을 따라 밖으로 나가 바깥공기를 쏘이고 싶었다.

가을 냄새가 퍼지고 있는 파리와 달리 남쪽은 여전히 더운 기운이 여름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sncf app



12시 30분 즈음

바욘 역에 드디어 도착했다.

환승 표를 확인하고는 작은 바욘역에 도착해 역 앞에서 언니가 싸준 초코 샌드위치를 한 개를 꺼내 먹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도 있었고, 잠깐 햇볕을 쪼이면서 생장에 가는 기차가 오길 다들 기다리는 무리들이었다. 역 근처 마을을 조금 구경을 하다가 아무래도 기차역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기차역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오렌지 주스 한 개를 사서 목을 축였다.

아직 어색한 새 등산복을 입고 모여 있는 초보 순례자들은 전광판을 바라보며 어미새가 모이를 주는 시간을 바라보듯 기차를 기다렸다.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은발의 짧은 커트 머리 여자분이 앉은 라운드 형태의 의자들이 유일하게 보이는 빈자리였다.

나는 빈지리 나며 묻고는, 그분 가까이 앉았다.

거기만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은 네 명의 순례자는 자연스럽게 입을 떼게 되었다.


짧은 커트 머리의 은발의 여자분 이름은 “실비” 캐나다인 퀘벡 출신이다. 그리고 키가 아주 컸던 이탈리아 순례자 아저씨는 순례길이 두 번째라고 했다.

영국 할아버지 순례자 역시 키가 190은 되시는 듯했는데 자연스럽게 순례길 첫 번째로 입을 땐 메이트 들이었다.


역사를 가득 매운 순례자들은 계속 직원에게 몇 시에 출발하는지 직접 물어보며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한국처럼 손을 놓고 있다가 기차가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런 사례는 아주 자주 빈번히 잃어난다.

기계결함, 노조파업, 악천후 등 이유도 다양하다.


남자 직원이 안으로 들어와 연착된 기차 소식을 전했다. 불어로 뭐라 말하고는 12시 30분 생장 가는 기차를 타시는 분들은 모두 버스를 타라고 안내를 했다.


사실 불어로 무슨 이유인지 답을 해 준 것 같은데 알아듣질 못하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실비는 직원에게 불어로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는 모두 생장 가는 분들은 버스로 이동해야 한다고 영어로 입을 떼었다. 우리는 가방을 메고 버스로 자연스럽게 승차했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했지만 순례자들에게 이 또한 재미있는 유럽에서의 해프닝으로 너그럽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첫 단추가 잘 꽤져야 한다는데 벌써부터 나는 이렇게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첫발을 땠다.


실비와 나는 자연스럽게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각자 꿈을 꾸던 생장의 자연경관을 카메라로 담아내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다들 버스 안에서 연신 바깥 풍경을 카메라로 담아댔다.


생장에 가는 길이 마치 수학여행 가는 대절한 버스에 탄 학생처럼 다들 업된 상태였다. 구블구블 험한 산을 넘어, 설악산 가는 길처럼 울렁울렁 고도가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임에도 순례길에 대한 기대와 흥분 여러 감정이 섞인 우리는 마치 오래 만난 친구처럼 긴장을 말로 쏟아냈다. 실비는 까미노길 대부분의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나는 론세스바예스 밖에 예약하지 못해서 빨리 숙소를 잡으러 공립 알베르게에 가야 한다고 했다.

왜 실비가 나의 첫 번째 순례길 친구라고 말할 수 있냐 하면 왓츠앱에 처음으로 추가한 외국인 친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반 길에서 한두 번 마주치고는 서로의 속도가 달라 마주치질 못했지만 각자의 길마다 서로에게 맞는 인연이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면서 순례길 표식을 따라 크루덴셜 순례자 사무소로 행렬을 따라 걸어 나갔다. 수십 번 유튜브에서 봤던 풍경이 실제 내 눈에 들어왔다.


책 100권을 읽거나 영상을 수십 번 본들 직접 부딪히는 것 한 번보다 못하다고 말하는지 느껴질 정도로 생장의 햇볕은 아주 뜨겁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생장역 입구 &순례자 동상


우리는 펄쩍펄쩍 뛰면서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외쳐댔다.


“드디어 생장”에 도착했어!

바로 그곳이야!


다 큰 어른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꿈을 꾸는 것 마냥 이게 현실인지 계속 확인하려 했다.





우리는 크루덴셜 사무소에 1등으로 줄을 섰다.

2시 30분까지는 시에스타 시간이었기 때문에 한 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옆에는 캐나다 분 한 분이 더 계셨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데비”라고 부르기로 하자.

데비와 실비는 모두 직장을 은퇴하고 순례길을 왔다. 실비는 경찰로 일하고는 일찍 은퇴를 했다고 했다.


10살 정도 차이 나니까 언니가 맞는 것 같고,

데비는 60 정도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인데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사실 그 상황에선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열려있긴 하다. 우리가 선 줄 뒤를 따라 줄이 길게 늘어섰다.


자연스럽게 새치기를 시도하려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이 언니들 조금 무섭게 문단속을 해주셔서 1등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숙소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두 분은

이미 예약을 미리 하고 온 상태였다.


이렇게 다들 부지런하니까 내가 8월에 예약하려 하는 곳마다 예약이 꽉 찼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숙소는 여권을 받고 나서 등록을 해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아까 바욘역에서 만났던 이탈리아 아저씨가 나타나 우리에게 숙소를 잡았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여권을 받고 무니시팔 숙소로 갈계획이라고 했더니, 벌써 줄을 다 서고 있어서 지금 가서 기다려야

선착순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을 했다.


그러고는 아저씨는 본인은 지인들이 다른 숙소를 잡아줘서 자신의 자리에 네가 서라고 얘길 해주셨다.


웬 행운이 이렇게 자꾸 날아오는 거지?


나는 숙소가 더 먼저란 생각이 들어서 실비와 데비에게 인사를 하고 무니시팔 알베르게 앞으로 걸어 올라갔다.


해가 어찌나 뜨겁던지 모자에 그늘막 똑딱이를 붙이고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성큼성큼 나를 안내해 걸어가는 이탈리아 아저씨 뒤를 따라 무니시팔 알베르게 앞에 줄지어선 배낭 앞으로 가서 아저씨 가방과 내 가방을 바꿔 줄을 새워 주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감사함을 전하고는 아저씨는 바람처럼 다시 사라졌다.



구글 뷰(알베르게&산책길)&내가찍은 식수대



뜨거운 태양에 그늘이 없는 숙소 앞 줄 맞은편에 순례자 표식이 있는 식수대와 유네스코에서 지정된 아름다운 마을 표식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뒤섞여 명동 거리만큼이나 정신없는 행렬이 펼쳐졌다.


순례자들은 숙소가 문을 열기까지 맞은편 식수대 옆에 자리를 펴고 앉아 배낭을 대기줄을 세워 두고는 식수대물을 병에 담아 목을 축였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수만 번 상상했던 순간이 현실로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살면서 상상했던 것이 꿈처럼 이루어지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내 행동 하나하나가 아쉽고 아까워서 기록으로 담아주고자 사진을 연신 담아댔다.


이곳에 온다고 두려워서 매일 울고 웃던 고민들을 날려 보낼 정도로 생장을 품은 피레네 산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맑은 공기가 내 고민거리들도 다 날려 보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산티아고라는 전설 같은 동화책이 있다면 나는 이 책 속 캐릭터 중 하나로 걸어 들어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첫 챕터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생장에 도착해 알베르게 숙소 줄을 서고 있다니!!!


흐르는 시간 아까울 정도로 지금 순간이 소중했던 것 같다.


sjpp municipal albergue
숙소에서 보이는 창문뷰

숙소 대기 줄도 역시나 거의 앞줄이었기 때문에 나는

금방 숙소로 들어가 벙커침대 12유로 숙박비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지상층 1층침대를 배정받고는 크루덴셜 여권 사무소로 달려갔다.  


우와~ 웬걸 아까보다도 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배낭을 벗어놓고 가볍게 오분 거리의 사무소에 여권을 만들기 위해 긴 줄에 다시 합류했다.

여권은 언제든 받을 수 있지만 숙소를 못 잡으면 숙소를 첫날부터 찾아 헤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숙소를 못 잡으면 찾으러 다니러 고생을 해야 한다 순례길 경험자들이 하도 겁을 줘 나서 처음 도착한 이곳에서 바짝 긴장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에겐 첫날 받은 숙소 도장이 없다.

그때 받는 침대 자리 배정표만 가지고 있다.



크루덴셜 사무소 대기줄



내 앞줄에는 9명이나 되는 호주 대가족이 줄을 서 있었는데 이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호주에서 어학연수를 했었다. 나의 여행 인생의 포문을 열은 첫 나라가 호주이다.

그래서 나의 기본 정신에는 “OZY오지 마인드”가 깔려 있다. 호주의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만큼 천천히 여유 있게 느긋한 마인드가 있다. 그래서 나는 호주가 나의 마음의 고향처럼 늘 그리웠다.


눌린듯한 호주 발음도 웬만하면 다 알아들으니까 말이다. 누구에게나 첫 시작은 설레고 즐겁다.

내 뒤에 있던 헬창 스페인 아저씨들은 우리에게 너희들도 호카를 신었다면서 즐거워했다.

호카가 스페인 꺼라며 자랑스러워했다.


호카가 일본 거 아닌가?

미국 거 아니야?


호주 가족과 쏙닥 거렸는데 한국 가서 알아보니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만든 미국 브랜드였다.


호카에서 순례길에 브랜드 협찬을 해줘야 할 정도로 트래킹 브랜드들의 향연이긴 하다.

트래킹용품 비용이 얼마인지 듣고 나면 뜨악할지도 모른다.


너무 비싸서 순례길 걷겠나 싶을 정도로 순례길은 우리가 속된 말로 ”산티아고 인더스트리“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기반에 큰 영향을 주는 산업 중 하나이다.


돈키호테의 이상을 품고 순례자의 순결한 길을 통해 깨끗해지겠다는 하는 다짐보다는 현실 적인 것만 보고 길을 걷는 다면 이 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을까?


개인적으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와 생장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생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첫 입학의 시작점에서 모두의 설렘이자 두려움이란 감정이 함께 공준 하면서 걸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크루덴셜 사무소 풍경


첫 여권 도장과 나의 조개


관광안내 사무소에서 여권에 첫 도장과 시작 날짜 그리고 해리포터가 마법 지팡이를 정성스럽게 고르듯 나 역시 순례자를 표시하는 나만의 조개를 집었다.


여행 내내 나와 함께 여행을 갈 동지이자 표식이 될 것이다. 이 조개 표식 하나로 모든 걸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잘 도착했음을 파리의 언니와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렸다.


첫날 함께 숙소를 공유한 사람들이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길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숙소에서 만난 순례자들의 얼굴을 꾹꾹 눌러 찍은 도장처럼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유적지 올라가는 산책로


숙소로 돌아와 유적지 산책을 갔다.

위로 올려다보자 모여 있던 유러피안 히피 여행자 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휴가를 내고 이주동안 길을 걷고 있는 동유럽 순례자.

부부끼리 은퇴 후 길을 함께 걷는 한국인 순례자.

기타를 들고 온 순례자.

보더콜리를 데리고 함께 길을 걷는 순례자 등등

각국의 사람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모인 첫 시작점이었다.

그 속에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긴 하루를 보내고 중세 유럽 풍경 속으로 들어온 나에게 파리에서의 휴가는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늬였늬였지는 붉은 해가 건물들이 도미노 쓰러지듯이 그림자가 드리웠다.




숙소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하며 침대에 누웠다.

 갑자기 엄마와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엄마는 늘 야행성이라 늘 2시에서 3시쯤 잠에 드신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해서 12에서 1시에는 잠이 들어야 하는데,

밤에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음에 잠을 설치곤 했었다.


엄마는 순례길에서는 공동 침실에서 잘 텐데 잠귀가 밝아서 어떡하냔 걱정 어린 잔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여기는 8시만 돼도 차 경적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아주 조용하고 고요한 시골 동네이다.

괜한 걱정 하나가 떨어져 나가며 나는 피식 웃어댔다.


밤이 되고 뜨거웠던 태양이 없어지자 산공기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왔다.

다들 그 이름도 악명 높은 피레네를 올라야 하기 때문에 9시부터 잠잘 준비를 했다.


서로 찍어준 풍경


저녁 해지기 전에 왓츠앱으로 연락해서 실비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눴었다.

해가 너무 뜨거워서 가지고 있던 모자 보다 더 챙이 넓은 모자를 구입 했다고 나에게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은 마을에는 거의 카드가 안되고 현금으로 물건들을 사야 했다. 나는 내일 걸으면서 먹을 토마토와 바나나 한 개 그리고 저녁 샌드위치를 구매했다.


생장에 있는 성당 구경도 하고 입구를 지날 때 있던

거리 음악가의 버스킹을 지나며 마을 입구를 지나쳐 다음날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실비는 메인 거리를 나와 다리 바깥쪽에 숙소를 잡아서 한참을 걸어 나갔었는데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콩알만 하게 풍경과 함께 담아 찍어 보여주었다.



까미노 길의 첫째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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