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휴식
9월 11일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남겨 놓은 메모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유럽 오기 몇 개월 전부터 산티아고 길을 걷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나의 계획에 파리에서 쉬는 계획은 포함되 있지 않았다.
프랑스에 오면 로맨틱한 이미지에 환상을 가지고 대부분 사람들이 파리의 악취나 불편한 교통편, 높은 물가, 민감하고 퉁명스러운 파리지앵들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 Gif-Sur-Yvette에 와서 이주째 지내며, 이제는 눈을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Bon Jour “라는 인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줄리엔 줄리아에서 프랑스 가정식을 미국에 대중화 한 줄리아 차일드와 2002년도 미국 뉴욕에서 911 피해자 보상 안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줄리 파월 이렇게 당대 실존 했던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줄리의 유일한 취미는 요리이다. 누구보다 줄리아 차일드의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찬양하며 그녀를 멘토로 삼고 줄리아 차일드 프랑스 가정식 요리 만들기 책을 직접 집에서 요리해 보면서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다.
줄리아 차일드의 남편은 외교관으로 파리에 파견되어 자리를 잡게 된다. 미국 상류층 집안 출신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줄리아에게 프랑스는 꿈의 도시였다. 파리에 자리를 잡고, 꿈이었던 요리를 배우러 르꼬르동 블뢰 고급반에 입학하게 되면서 요리에 대한 자신의 꿈을 펼치게 된다. 당시 르꼬르동 블뢰 고급 과정은 전문 요리사를 위한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었다. 줄리아 차일드는 오롯이 자신이 원하는 것에 선입견을 뛰어넘어 도전하는 인물이었다.
영화 중 줄리아의 남편이 쌍둥이 형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나레이션으로 읽는 부분이 있는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줄리아는 미국인이지만 영혼이 프랑스 사람인 것처럼 새침하고 자존심 높은 프랑스 사람마저도 그녀를 싫어할 수 없는 매력을 가졌지!
그녀의 영혼은 이곳과 꼭 들어맞는 것 같아. “라는 대사가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기억하냐면 나 역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줄리아가 프랑스에서 느꼈을 그 기분과 영혼의 안식을 나는 백 프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겉모습은 백 프로 한국인이지만 내 영혼의 매치는 프랑스에 맞춰져 있었다.
내가 수십 번 봤던 영화 중 손에 꼽는 영화 중 하나인 줄리앤 줄리아는 실존 인물을 다룬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성장 스토리이다. 두 여성분 모두 현실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한 실존 인물 들로 적고 기록하는 것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나의 위치에서 내 꿈을 믿고 앞으로 나가도록 도와준 상상 속 멘토였달까?
나 스스로 선택한 산티아고를 걷는 선택에서 줄리앤 줄리아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인생의 선택들은 나에게 네가 가는 그곳의 그 레시피가 각자의 입맛에 따라 변하듯 이것이 너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로수의 노란 불빛이 고흐의 노랑을 표현한 것 같은 프랑스의 밤 풍경이 마음의 안식을 주는 것 같이 나의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해 주었다. 반고흐 역시 싸구려 여인숙에 묶었던 밤 풍경을 그려 넣었던 걸 보면 그가 그곳을 얼마나 애정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말 보다 그림으로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종종 프랑스의 풍경 앞에 그의 그림이 겹쳐져 보이곤 했다.
프랑스를 떠나기 싫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곳의 고요하고 조용하고 한적한 풍경이 나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굳이 산티아고에 갈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밤늦은 시간 스산하게 깔린 물안개와 지렁이 대신 손가락 굵기 보다도 큰 집 없는 민달팽이들을 피해 트래킹 코스를 걸으며 산책을 했다.
뉴욕에 있는 친구와 오래간만에 통화를 나눴는데,
그 친구 역시 인생의 폭풍우를 지나 어느 날부터 마라톤을 뛰기 시작했다. 곧 뉴욕 마라톤을 달리기 위해 기록을 만들고 몸을 만들고 있었다. 역시 체력이 있어야 멀리 갈 수 있다.
그 친구는 자신조차도 이렇게 뛰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우리는 내 인생조차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그저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산티아고 가는 기차 티켓을 취소했다고 하니 조금 늦춘 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렇다 누가 가라고 떠 민 길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저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
늘어난 시간 덕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다.
정말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말이 딱 맞다.
그래서 만남이 아쉽다고 혹은 끊고 싶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어떻게 된 인연인 건지 언니와 내 친구는 서로 접점이 있다는 게 진짜 신기할 노릇인데, 우리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기숙사 학교에서 동고동락을 한 동기이다.
졸업을 하고 교류가 많이 없었기도 하고 지방에 내려가 언니와 함께 프로젝트로 작업을 하게 되며,
언니와 내 친구와의 인연을 알게 됐었다.
아빠의 부고로 외국에서 자리를 잡은 이 친구의 소식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멀리서 연락을 주고 마음을 표현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시간 때가 같은 공간에 있으니 연락을 해서 시간을 물어봤다. 만약 이번주 내려갔으면 못 봤을 인연을 시간 내서 만나게 되었다.
혼자서 친구네 집도 언니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집을 찾아갔다.
로댕박물관 근처 베르사유궁으로 가는 RER C선으로 갈아타 Meudon역에서 내려 걸어가면 되었다.
이 친구 역시 파리에 이사 온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아서 집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친하고 안 친한 건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우리는 각자의 히스토리를 풀어 나갔다.
긴 시간만큼 켜켜이 쌓인 희로애락을 한마디로 풀어 나간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빠르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다 파리로 유학을 떠나 연락이 끊겼던 후배 소식을 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도 연락이 닿았다.
“와 진짜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니까!!!”
이 친구야 말로 파리 살이를 오래 해서 파리지앤느로 멋지게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이 후배가
나는 내가 꿈을 이룬 것처럼 자랑스러웠다.
이 후배 프랑스 이름으로 말하자면 Ces이다.
세즈는 요새 친구들이 자주 가는 레지던시와 예술 공연 그리고 삼청동 같은 동네를 안내해주었다.
그간 궁금했던 다른 후배들 소식들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 유럽에 왔다고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 사람들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있는데 불어 발음이 섞인 한국말로 말이 많은 친구는 아니지만
거기 “빈대 옮을 수 있다던데 왜가?”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나는 익숙한 반응이 나올걸 예상하고 가는 이유를 이야기해 줬다.
작년에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셨어.
그래서 가서 마음도 정리 하고 싶어서 유럽에 왔다고 했다.
동생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간 연락이 없어 전혀 소식을 몰랐다며 미안해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신기할 정도로 힘들어했던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파리의 거리는 정말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는 감독의 시선처럼 어디를 들어서건 걷기 좋은 도시이다.
우연히 들리는 반도네온 연주와 지하철에서 하는 버스킹 연주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촘촘히 쌓인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약간은 헝클어진 듯한 그들의 옷차림도 왜 이렇게 내 눈에 콩깍지가 씐 것처럼 멋있어 보이는 건지, 의외로 치마를 많이 입고 다니는 프랑스 여성들과 나폴레옹이 잘생긴 프랑스 남자만 군인으로 데려가서 프랑스 남자는 잘생긴 사람 씨가 말랐다는 선입견을 없앨 정도로 아름다운 비주얼의 남자들이 멋있게 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어린 여자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자신들이 멋지고 아름답다는 걸 아는 여성들이 프랑스 여성이 아닐까?
그 안에 철저한 개인주의와 수많은 독거노인들의 외로움, 인종차별과 난민 문제 그리고 테러 문제까지 큰 사회에 맞닥뜨린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 부분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도시가 알려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여성과 남성은 젠더 이슈와 정치적 이슈로 더 이상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가 되어 버렸다.
예술도 투자의 가치로 떠오르면서 문턱이 낮아졌다.
참여가 높아진 것은 긍정적인 효과이지만 서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돈과 다이내믹한 에너지 열심히 일하고 부를 쌓아 최고가 되자! 가 캐치 프레임이다. 나는 그 폭주 기관차 같이 변화하는 서울의 에너지가 지친다.
그림을 그리고 활동하면서 늘 내 안의 본연의 자아를 꺼내고 싶은 깊은 고찰과 이 그림이 팔리는 그림이 되기 위해 어떤 이슈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기승전 “돈”으로 모든 이야기가 돌아가는 사회에서 내 영혼은 점점 메말라 가는 게 느껴졌다.
여행자 모드로 파리에 머물며 잠시 멈춰서 파리 살이를 하고 있으니, 파리의 작은 풍경들의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안전하고 좋은 곳에 머물러 꿈 보다 해몽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다.
이것은 나의 여행 이야기며 휴식기간 갖었던 꿈을 현실로 풀어낸 이야기기 때문이다.
한국의 4배나 비싼 생활비와 물가에 파리 살이는
분명 현지인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그래서 그렇게 유럽땅에서 유일하게 발바닥 불나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파리 중심부에 에어 비엔비를 예약하려면 한 달에 삼백만 원 정도의 비용을 준비했어야 했으니 말 다한 것이다.
대신에 중심부에 숙소를 잡으면 교통비가 절감될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차라리 중심부에 집을 빌리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다른 욕심은 없는데, 외국 살이와 내 작업에 대한 욕심은 질투가 날 정도로 많은 편이라 그 욕심을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차라리 일을 더 많이 하는 방식으로 표출하는 편이었다.
누가 결혼을 했다거나, 부자가 됐다고 했을 때 부럽지 않다 하지만 외국 어디를 갔다거나 작업이 잘 풀려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질투가 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내 직업관이나 작업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고 가혹하게 나를 늘 몰아붙이게
되는 것 같다.
꾹꾹 눌러 담은 질투심과 욕구를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 덕에 어떤 친구는 나에게 되게 여유 있어 보인단 이야기를 했었다.
사실 그게 내가 가진 어두운 부분을 감추고 싶었던걸 잘 은폐하는 기술이 성공적이라는 말과 같다.
팔불출 같이 내가 한 작은 낙서부터 작업들이 나는 키웠던 강아지와의 추억처럼 소중 하다.
나 자신에게 여행자 모드를 선사하고 여행 때 늘 해보지 못했던 관광객 모드로 파리 유람선을 탔다.
현지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한국 여행 사이트에서 예매를 하면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서 단체 관광객 마냥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서울에서도 안타는 유람선을 타고 파리중심부 센강을 관통했다.
나는 파리를 배로 가로질러 파리를 관통하며 구경하고는 걸어서 파리시내를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나도 모르게 몸에 밴 걷기가 우연히 마주친 파리의 풍경과 마주치며 10킬로 미터 이상 나를 걷게 만들었다.
머리 한 부분에서는 계속 산티아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 밴 걷기 습관이 파리 거리를 걸어 다니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찌는 듯 뜨거웠던 태양도 어느새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변하며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34도였던 날씨는 어느새 20도로 떨어졌다.
이제 갈 시간이 되어 간다고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느리지만 차분히 이 도시가 나에게 나의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파리 역시 산티아고로 가는 세인트 자크 드 콤포스텔라 라는 길이 연결 되어 있었고, 내가 머물고 있는 언니네 집 근처를 지나는 표지판을 언니가 안내해 줬다.
길을 미루고 잠시 풀이 죽어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오히려 가지 말라고 했던 언니는 티켓을 알아봐 주며 갈 타이밍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됐다.
집 근처 트레일코스를 짐을 메고 함께 걸어 보기로 했다.
프랑스길이 생장에서 산티아고 까지 800km인데 파리에서 산티아고까지 1770km이면 대강 계산을 해봐도 나는 파리에서 생장까지 1000km를 걸어야 한다는 소리니까 내 속도로 걸으면 아마도
3개월은 걸리지 않을까 계산해 봤다.
하지만 파리를 관광하고 싶지 순례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건 더 높은 레벨의 이야기일 것이다.
뒷산에는 어느새 밤이 떨어져서 바닥에 깔려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나는 잘 걸었다.
내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거다.
내 몸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이템 줍듯이 밤송이를 벗겨 가며 트레킹 코스를 걷기 시작했는데, 떨어져 있는 밤을 주으며 천천히 길을 걸으면서 얻은 작은 밤톨 뭉치 처럼 용기가 뭉글 뭉글 솓아 나는걸 느낄수 있었다.
작은 것들이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한아름 밤을 따서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 간식으로 밤을 쪄 먹었다.
저녁 8시에도 밝았던 하늘은 일주일 만에 가을 저녁으로 변해 있었다.
빠르게 땅거미가 지고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아주 작은 불만 켜놓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기세가 살인적이기 때문에 대부분 어둡게 사는 게 익숙한 유럽의 삶이다. 명화나 영화 작품에 보이는 작은 촛불을 켜고 사는 유럽인들의 모습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 고충이다.
그날 저녁 나는 기차표와 론세스바예스 숙소를 다시 예약을 했다. 바쁘게 사는 표가 한국에서 미리 했을 때만큼 저렴하진 않지만 더 미루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몸과 마음 모든 준비를 마쳤다.
9월 19일 기차 예약을 마치고 드디어 갈 준비가 완료 됐다. 이제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도 혼자 갈 수 있고, 자신감이 붙었다.
나는 이제 간다.
C’est Parti!
드디어 순례자로서 제대로 된
첫발을 땔 준비가 완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