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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Apr 11. 2024

파리살이 적응하기

시차; 성난 사람들





유튜브를 보면 비행기로 도착하자마자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하고 바로바로 생장으로 내려가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다.

마치 이미 다 준비돼 있는 사람처럼 그들에겐 시차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나 남의 이야기에 보이지 않는 찌질하고 지리 멸렬 하며 지루한 부분을 보통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현실과 영화의 차이는 근육이 강화되고 예열되는 이 시간이 나에게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


언니집에 도착하고 강아지 같은 조카들이 나에게 달려들어 포옹을 하며 인사를 해주었다.


10시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장시간의 비행피로를 샤워물로 씻어냈다.

방에는 언니가 호텔 서비스처럼 준비해 놓은 과일과 다과가 준비돼 있었다.


새벽서부터 치른 전쟁 같은 출국을 마치고 드디어 프랑스 땅을 밟았다.


“얼마 만이지? ”


사방이 어두운 밤시간이라 머리를 말리곤 몸을 침대에 뉘었다.


몸은 이미 피로를 넘어서 눈꺼풀이 잠겼지만 침대에 눕자 새로운 공기와 물 음식

그리고 공간에서 마치 기름이 물과 분리된 듯

나는 잠이 쉽게 들지 못했다.

두 시간마다 잠에서 깨었던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 위로 내 몸이 통증으로 응답했다.


너 아까 왼쪽 종아리 저렸지?

휴족시간과 클락스 마사지로 마사지를 하라고...

몸은 나에게 통증으로 아우성을 하고 있었다.


초보 여행자에게 장기비행은 저질 체력자가 처음 겪는 근육통처럼 여행통을 불러 잃으켯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말이다.

이렇게 시작도 전부터 아파서 잘 걸을 수 있을까?

지레 나는 걱정이 시작됐다.





RER C 라인 지하철 역



9월 6일 수요일 Gif-sur-Yvette (지프-슈흐-이베트)


나는 새벽 4시쯤 엄마에게 도착 안부 문자를 보냈다.

한국시간과 유럽 시간은 서머타임 때문에 한 시간 당겨졌다고 해도 반나절은 차이가 났기 때문에 내가 새벽시간엔 한국에선 따뜻한 해를 받으며 오후시간 활동을 할 시기였다.


나의 소식을 궁금해했던 친구들과 만든 톡방에도 잘 도착했음을 알렸다.

시차가 달라진 공간에 와서 좋았던 건 밴쿠버와 뉴욕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이 한국보다 수월했다.


한국에서는 여름 공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어서, 프랑스 날씨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프랑스 여름은 공공시설에 에어컨이 없는 걸로 악명이 높아서 웬만하면 여름을 피해 가을을 택해서 왔건만

파리는 이상기온으로 9월임에도 여전히 폭염이 지속 됐다.


나는 아침 7시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눈을 뜨고 방 창문 커튼을 열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일반적인 파리의 유스 호스텔이나 파리 중심부의 비엔비 랜트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교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내가 거주하는 곳을 프랑스 사람들에게 어떤 곳인지 물어보면 판교나 분당 쪽 전원주택촌 같은 분위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근처에는 초 중 고등학교가 오분 거리에 다 있었고, 심지어 프랑스 최 상위 이과계열 학생들이 지원하는 카이스트나 대덕연구단지 같은 태양열 연구소가 있었다.

마을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자전거 트래킹 코스로도 유명한 동네임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는 초등학교 까지는 매주 수요일이 휴무라고 한다. 주 4일 학교를 간다.

(지역 구나 교장 재량에 따라 다를 수 있음)

그래서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안 자고 있구나 싶었다.


수요일에는 푹 쉬고 목요일에 등교를 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부러운 풍경이었다.

업무를 하다 보면 수요일과 목요일에 몸이 쳐지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는데, 요일의 중간 지점 잠깐의 휴식이 다음날 활력을 주는 쉼표로 작용하는 듯 보였다.


초등학생까지는 수요일이 휴일이기 때문에 초등생을 키우는 학부모는 그 시간에 맞춰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법적 직업적 조치가 다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휴일이라 모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언니네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프랑스 일부 가정에서는 5세 전까지는 미디어 노출을 극도로 줄인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10살인 단아 7살 수진과 5살 이든까지 거의 5년 이상을 텔레비전 없는 삶에 익숙하게 사는 듯했다.


대신에 마을 어린이 도서관에 들러 캐리어 가득 일주일 동안 볼 책을 빌려 오는 게 이 집의 휴일 풍경이었다. 어릴 적부터 책과 익숙한 습관을 들이는 건 좋은 것 같다.


세명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집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정신없을지?


언니는 유모차를 거의 십 년 넘게 잡고 있다가 이든이 작년에 프랑스 어린이집에 등교를 시작하는 만 5세가 되면서부터 유모차를 놓고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아이 한 명만 키워도 힘든 시기 언니뿐 아니라 프랑스 가정의 분위기는 두 명 혹은 세명 이상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이 동네 지프 슈흐 이베트의 분위기는 세명 이상의 아이가 한 가정에서 키워지고 있었다.

정부와 마을 그리고 부모가 모두 준비되어 있는 분위기였다고 해야 하나?


내가 어릴 때 봤을 법한 품앗이라던가 마을 커뮤니티와 부모님들이 학교에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것들 모든 것들이 아이들이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집 근처에 직장까지 대도시로 갈 필요 없는 안정적인 시스템이라 해야 할까?


점점 핵가족화 일인가구가 가속되어 가는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도 결혼은 많이 하지 않지만, 사실혼 관계에서 결혼을 해도 법적 혜택과 문화적으로도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는다.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밀려오는 집안일에 언니는 눈꼬뜰새 없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여기와 있는 동안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눈치껏 도움을 줘야 했다.


수요일 오후 함께 어린이 도서관으로 이동중


어린이 도서관 앞


어린이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 정도 거리인데 각자 책가방에 읽을 책 열 권과 세 명이 같이 읽을 책까지 거의 50권 정도를 캐리어에 끌고는 언니와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펼쳐놓고 이든과 수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고, 단아는 어린이 소설을 읽었다.


책을 많이 읽는 단아는 평소 소설을 쓰는 것도 취미라고 했다. 아기들도 평상시 심심하면 그림을 종이에 각자 그리고 있었다.


어릴 때 생각을 해보니 나도 이렇게 믿도 끝도 없이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책을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그 모습이 지금의 나로 현실화 된 것 같았다.

무슨 인생의 연극에 나오는 무대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한국에 남자아이 두 명을 키우는 친구집에 갔을 때도 친구는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면 태권도 학원> 댄스학원> 축구교실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8시면 잠을 재운다. 기운이 빠질 때까지 놀아야 잠을 잔다고 했다.


오 마이갓!


트레일 걷기와 철봉놀이


언니는 저녁을 먹고 마지막으로 집 근처 산책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나를 아이들과 함께 데리고 갔다.

아직 어린이들은 기운이 남았는지 전력 질주 하며 뛰어다녔다.

철봉에 매 날려 얼마나 오래 매달려 있나 서로 나와 언니에게 보여주며 뽐내기 시작했다.


언니 집에서의 일상은 이렇게 아이들과 있다 보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나에겐 일주일이 유럽에서의 예열 시간이었다.


나는 여행이라기보다는 파리살이를 본의 아니게 하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정말 언니에게 감사했다.


아이들과 뒤섞여 놀면서 유럽의 공기와 시간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에꼴 노말 수페리어 파리 스칼레이 공과 대학 캠퍼스


9월 7일 목요일 파리 스칼레이 에꼴 공과대학 캠퍼스


언니와 잠시 수진이 치과 진료를 보러 집 근처 대학가로 함께 이동했다.

이곳은 형부가 한국 같은 곳이라 말하는 곳이었는데, 보기 드물게 계획도시로 만든 신사옥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서 새 건물밖에 없어서라고 했다.


웃픈 현실이긴 한데 실제로 가봤더니 정말 한국같이 새 건물과 상점들이 줄지어 있어서 편리하게 다닐 수 있어서 나는 여기가 분당이나 판교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미디어가 절제된 상태에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다양한 행동을 하며 보낼 수 있는지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그간 있었던 일, 아빠의 부고, 등등의 여러 트라우마와 상처들의 잔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국 오기 전부터 언니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는데…


얘기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되는 이야기 지만 평생 겪은 트라우마와 30살 이후 꽁꽁 싸매고 살던 그런 시선과 삶을 등진 내 자아를 더 이상 내 마음 안쪽에 가둬 두고 싶지 않았다.


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캠퍼스로 나가는 길 언니가 툭 던지듯 무심하게 던진 질문에 나는 쉽게 무너졌다.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과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내 마음이 열렸던 걸까?

파리의 캐치프레임인 “사랑”과 “예술” 섬세한 “아름다움”이 나에게 여기서 마음껏 예민해도 돼! 너 다워 져도 괞찮다 “라고 도시가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한국에서 꾹꾹 눌러 담겨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말았다.


언니 앞에서 정말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다 커서 길에서 엉엉 울고 있자니 왠지 모를 해방감이 마음이 시원해지는 듯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목놓아 울기는 정말 어린이 때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세 아이를 키우는 것만도 힘이 부치는 일이다.

나까지 언니에게 기대야 하는 상황이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면 나 역시 언니처럼 위로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할 거라 다짐했다.


일어났던 과거 보다 지금 현재 여기에서 내 입으로 그 결계를 풀었다는 해방감이 컸다고 느꼈다.




ile-de-Frence-Mobilites app & 현재 위치에서 도착 역까지 검색(역 전체지도는 없음)


몽파를나스역 표지판 및 가는 기 내부 거미줄 처럼 정신없는 몽파르나스 역



9월 10일 일요일 파리 몽파르나스 기차역에서 교회 가기


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 교회로 향했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데 웬 교회?

내가 여행을 가서 교회를 가는 이유는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기도 하다.


유럽의 경우 음악 전공 한국인들의 클래식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다.


파리 지하철 안내앱은 실시간 교통상황에 맞춰 노선도를 알려주었다. 늘 공사나 파업으로 노선이 바뀌기 때문에 꼭 체크하고 다녀야 한다.

갑자기 지하철을 타다가 기차선로 문제로 내리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지하철 RER B선을 타고 환승 후 몽파르나스역으로 나왔다.


몽파르나스역에서 점심을 먹으며 언니와 기차 티켓 확인하는 예행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역만큼이나 정신없는 몽파르나스 역은 거의 모든 라인의 환승장이다. 생장에 가는 기차 전광판을 찾고 게이트 쪽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자세히 언니가 알려주고는 혼자서 한번 돌아다녀보라고 각자 시간을 가졌다.


생장역은 바로 가는 직행이 없다.

보르도 지역인 바욘역에서 환승을 해서 가야 한다.

그래서 전광판에서  Saint-Jean-Pie-de-Port Station으로 찾는 게 아니라 보르도라는 문장과 티켓에 있는 일련번호를 꼭 찾아서 실시간으로 변하는 전광판 알림을 확인해야 한다.


이 정신없이 큰 몽파르나스역에 도착해서 3층 전광판을 보는데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가리비 순례자 표식 달고 가는 순례자와 몽파르나스역에서 적은 메모


하….

멘붕


분명 수십 번 유튜브를 보면서 메모까지 해놓았었는데

나는 길 잃은 양처럼 길들여진 양처럼 길을 찾지 못했다. 길치인 게 이런 데서 드러난다.


아직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머물렀다.


갤러리아 백화점 옥상뷰


교회 가는길 풍경> 교회 도착



우리는 다시 만나서 파리 시내를 걸어 교회로 도착했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교회를 가는 길도 아름답지만 중심가에 갤러리아 백화점 옥상에서 바라보는

파리뷰는 정말 맑은 파리의 날씨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파리시는 센느강 주변에 1 존과 2 존 까지는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로마처럼 걸어 다니기에는 정말 큰 도시이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다녀야 힘들지가 않다.


나는 프랑스 공유자전거 벨롭을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걷기 연습도 할 겸 거의 대부분을 걸어 다녔다.


냉방시설 없는 프랑스에서 갤러리아 백화점은 몇 안 되는 냉방시설이 갖춰진 건물이라 우리는 더위도 피하고 날씨만큼 멋진 파리 풍경을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옥상으로 향했다.


뜨거운 늦여름 더위에 여전히 여름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고온 건조한 날씨 덕에 밤이 되면 시원 하지만 낮엔 정말 냉방시설 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다시 여름이 온 듯했다.

밝고 뜨거운 햇볕이 나의 어둠까지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듯 느껴졌다.




교회에 도착해 브로셔를 받았는데,

나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회복”이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내 지친 영혼을 스스로 위로하라는 회복하라는 영혼의 메시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언니는 교회에서 한불 통역일을 맡아하고 있어서 언니가 하는 업무를 위해 다른 곳에 가있었고,

어린이들은 어린이 방이 따로 있었다.

오롯이 다시 나 혼자 남았다.

그리고

교회 예배 시간이 되어 성가대가 연주와 찬송가가 그 큰 공간을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혹시 넷플렉스에서 스티브연 주연의 “성난 사람들”을 보았다면 이해할만한 장면일 텐데

주인공 대니가 한국 교회에서 갑자기 회계하며 눈물이 터지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내가 지금 프랑스 파리 교회에서 갑자기 비프의 주인공 마냥 눈물이 터져 나왔다.


교회에 가서 많이들 운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성가대 찬송가 소리에 뒤섞여 나 자신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한번 터지기 시작했던 울음은 여기 교회에서 정점을 이뤘다 느꼈다. 누군가는 회계를 했다느니 부름에 응답이 왔다고 했지만, 나는 내 안의 내가 다시 마음을 열고 문을 연 느낌이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다행히 쓰고 온 버킷햇 모자를 눌러쓰고는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우는 게 속이 후련했다.


한국 사람치고 상처나 트라우마 없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비해 위로나 쉼표가 없는 사회에서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일반화로 각자 자신들을 병들어 가게 한다는 걸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상처 하나 트라우마 하나 아름다웠던 추억 하나하나가 작품으로 변할 수 있는 이 도시에서 피카소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장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섬세하게 모든 걸 수용하고 감싸 앉을 수 있는 파리의 감수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천재 예술가의 감수성이 폭발하며 그것이 예술이 되어 명작을 남겼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지만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지 않은가?


노하우나 전략 없이 도전한 수백 번의 실패 아빠의 죽음, 친구의 배신, 부모의 이혼, 인생의 여러 관계 등등 외부에서 일어난 꼬인 실타래들이 부단히 도 올라가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인생이 영화처럼 보였다.

언제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이 어디 있던가?


치유된 게 아니라 파 묻혀 전혀 상처는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성난 사람들 교회에서 주인공이 오열하는 장면


비프(성난 사람들)에 나온 대사인데 나 역시 이 대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이젠 척하지 않아도 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정말 고생 많았어..."


아무도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를 앉아주고 괜찮다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로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참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줄만 알았다.


”언젠가 저기 언덕을 넘으면 내 꿈이 답을 얻을 거야 “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 다시 회사로 돌아갔을 때 첫 심리상담을 받았던 날 목까지 차올랐던 감정이 기억난다.

힘든 감정을 얘기할 때는 다시 나는 그때 당시로 돌아갔다. 그때는 억지로 아픈 감정을 꺼내야 해서 집에 와서는 탈진해 쓰러져서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그때 그런 과정을 미리 겪어 봐서였을까?

살아 처음으로 내 안의 내면아이에게 건넨 스스로 깨달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였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이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걸을 준비를 해야 했다.

특히 순례길을 걷기 전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다.


세상에 손가락 욕을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나에겐 대리만족으로 다가왔었다.

극 중 외국사회에서 이민자와 유색인종으로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나, 나처럼 예술업계에 종사하며 이름 없는 예술가로 살아나는 것이나, 경계선 상에 서서 자신의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극과 현실이 공감하머 꼭 나 같아서 말이다.


상담사가 말했던 “심리적 고아 상태”라는 말에 나에 대해 이해가 가면서도 외롭고 쓸쓸했었는데, 비프를 보면서 위로로 다가왔었다. 나는 비프에서 말하는 내용이 성인이 된 우리들 현대인 모두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고아는 외롭고 스스로 모든 걸 혼자 해야 하고 백도 돈도 없다.


우리 모두는 결국 생물학적으로도 고아가 된다.

그래서 그전에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걷기를 시작한 갓난아이처럼 세상을 향해 독립하고 스스로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순례길로 갈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갈 준비가 돼 잇지 않았다.

이젠 프랑스 시차가 익숙해졌는데도,

여전히 왼쪽 종아리 알은 욱신욱신 마음속 통증처럼 아려왔다.


어딘가 풀리지 않은 매듭 한 개가 풀리면 다 풀릴 것 같은 답답한 상태였다.


나는 교회를 다녀오고 하룻밤을 꼴딱 새며 이 결정을 내리게 됐다.


그리고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예약을 해둔 것과 생장을 내려가는 기차표를 나는 취소해 버렸다.

일단은 쉬는 게 먼저라는 결론이 나왔다.


보통 순례길을 행하는 순례자들이 결정하고는 바로 하루 이틀 후 바로 순례길로 직행해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단 걸 깨닫게 됐다.


오십 퍼센트 이상의 기차표 수수료를 내고 취소를 했고, 다행히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예약 취소는 금방 입금이 돼서, 일요일 교회를 다녀와서 밤새 고민을 마치고 내린 결정을 월요일 아침 언니에게 알렸다.





9월 11일 월요일 출발 이틀 전


30살 언니가 알던 밝고 쾌활하고 꿈 많던 나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처 투성이인 나로 언니는 프랑스와 한국의 시차만큼이나 세월의 시차를 감당해야 했다.


만약 내가 혼자 파리에 와서 표를 취소했다면 나는 아마도 생장에 내려가서 며칠 더 머무는 결정을 내렸을 것 같다.


이 프랑스 살이가 너무 편해져 버렸다.

나의 케이스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고 있다.


언니는 나에게 순례길을 가는 것에 긍정적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진짜 표를 취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내가 다시 순례길을 걸을지 말지 결정 난 것이 아무것도 없이 다시 원론 적인 질문으로 돌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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